1차/퇴마사즈

고요와 키츠네

notion5846 2025. 1. 7. 20:48

"나 다음주에 일본에 다녀올게."

 

저녁 식사 자리에서 고요가 꺼낸 말에 천룡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연인의 얼굴을 보았다.

 

"원래 일본 쪽 길드랑 교류하던 게 있었는데 내가 분명 길드 그만둔다고 인수인계 다 했는데 그쪽에서 마지막으로 얼굴 좀 보자고 해서 길드도 사정사정하기도 하고 돈 받기로 했어."

 

능력 좋은 새끼, 천룡이 중얼거리고는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하였다.

 

"언제 가는데?"

"다음주 월요일, 인천 공항에서 출발하고 넉넉하게 일정 잡으면 일주일 안에 올 수 있을거야. 뭐 사다줄까?"

"도쿄 바나나."

"어, 인터넷에서 살 수 있지 않아?"

"아무거나 알아서 사오든가."

 

뚱한 천룡의 표정을 보면서 고요는 황급히 옆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던 토키를 불러 애써 그 시선을 외면하였다.

 

"토키, 너는 원하는 거 없어?"

"어, 괜찮으시면 제가 말하는 신사에서 부적 좀 사다주실 수 있으세요?"

"일정만 괜찮으면 그럴게."

 

이야기가 그쯤 되자 모두의 시선이 거실에 있는 미니어쳐 신사 위에 떠 있는 키츠네에게로 향했다. 뭐? 하고 되묻는 그 모습을 보고 다들 시선을 교환하였다. 대화는 안 했지만 똑같은 생각을 했다. 저녀석도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여우는 토키의 혈통에 묶여 있는 몸이었기에 여기까지 같이 왔다. 혈통에 묶인 강제 계약이 원인이라면-.

 

"토키를 대신할 존재가 있으면 되는거 아냐?"

 

키츠네를 돕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냥 토키가 키츠네 없이 평온하게 하루를 더 보내게 해주고 싶었다. 천룡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 고민했지만 그 고민은 짧았다. 그는 천재었고 재능도 있었기에 토키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주술의 바탕을 알아내고-천룡의 신에게 이런 짓을 하는 니네 가문은 뭐냐? 라는 말에 토키가 쓰레기, 라고 대답한 일이 있지만-그걸 응용해서 축소한 주술을 건 인형에 피와 머리카락을 매개체로 대타를 만들어 냈다.

 

"식신 비슷한 뭔가네요."

"일 끝나면 처분 제대로 해야겠다."

"니네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는거냐?"

"그래서 싫어?"

 

키츠네는 대답 대신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엉성하게 만들어진 인형을 받았다. 그렇게 고요는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공항에서 만난 길드의 전 상사의 뭐 그런 걸 데려왔냐는 잔소리는 곧 키츠네의 기세에 조용해졌다. 일본에서의 일정도 나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여우의 기세에 더 놀란 것만 같아보였다. 너 나름 쓸모 있다? 고요의 말에 키츠네는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걸로 대신 답했다. 생각보다 일정이 빨리 끝났기에 고요는 토키가 부탁한 신사의 부적들을 하나, 둘 사러 돌아다녔다. 일부 신사에 정화수니 술을 끼얹는 사고가 있었으나 그건 소소한 일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자신이 악령을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보일테니까.

 

"다음 신사는 어디보자."

"근처라고 생각은 했지만 제법 가깝군."

"여기 알아?"

 

지도를 보던 고요가 키츠네를 보자 그의 손가락이 산을 가르켰다. 이름조차도 평범한 산. 가고 싶냐고 물었지만 키츠네는 무표정으로 지도만 쳐다보았다. 대답하지 않았지만 고요는 그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산길은 오랫동안 아무도 들리지 않았는지 길조차 제대로 나있지 않았다. 수풀을 넘어서, 말라붙은 강을 건너서 도착한 곳은 마을이었다. 정확하게는 모두가 떠나고 자연에 먹혀 버린 마을이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도착하고 나서야 여기가 어딘지 눈치챘다. 여우의 마을일 것이다. 혹시 감정적으로 굴까 싶어서 긴장하는 고요를 두고 키츠네는 입을 열었다.

 

"저기에 강이 있었지. 여름에는 수영을 하고 겨울에는 썰매를 탔어. 강을 끼고 내려가면 있는 집에 묘이타가 있었는데 농기구 수리를 잘했지. 그 집 아들도 그랬고 그 윗대도 그랬고, 묘이타 옆집에 사는 아낙은 세시코였는데 매일 신사 앞을 청소해주었지. 그리고 저기 유카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는데 걔가 커서 낳은 애도 이름이 유카였지."

 

여우는 천천히 걸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랑 받은 기억을, 사랑한 기억을 토해내면서 희미한 흔적이 남은 돌계단을 올라 그는 무너진 토리이를 지나서 신사에 들어섰다. 뚜껑이 사라진 새전함에 든 뭔지 모를 동물의 백골을 보고 한숨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고는 그는 방울이 사라져 낡은 줄만 매달려 있는 신사의 처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고요는 주위를 좀 더 살펴보았다. 낡고 낡은 무너진 신사, 새전함의 동물 사체, 오래된 낙서들과 쓰레기. 신에게 이것은 모독이었을 것이다. 그런 신을 잡아온 가문도 참 간도 크군. 

 

"안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지. 인간들 중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는 적지. 마침내 아무도 내 목소리를 전해줄 이가 없어졌을 때 남은 이들은 신을 의심하고 믿음을 잃어버린 신은 마을을 지키지 못하고 마을을 지키지 못하니 믿음은 더욱 더 사라지지. 그렇지만 돌아온다고 한 그 말을 믿고 싶었어."

 

텅 빈 공간을 보고 있으려니 모든 이야기가 끝낸 무대처럼 보였다. 끝난 무대에 홀로 남겨진 여우가 이야기를 끝낸다. 고요는 문득 예전에 들은  노래가 생각나서 무심코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커튼콜은 내려와서 화톳불에 둘러앉고

먼지 쌓인 옛날 추억들이 갑자기 찾아오는 걸."

"나도 그 노래 알아. 들어본 적 있는 거 같네."

 

고요가 입을 다물자 여우가 뒤를 이어서 흥얼거렸다.

 

"아마도 그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나 봐

 아직도 파란 불빛 앞에서 그때의 흔적을 찾고 다시 돌릴수도 없는 태엽은 푹 잠들었어."

 

노래가 이어지고 후렴에 닿는다. 고요는 여우의 머리카락이 조금은 하얀색으로 변한 거 같아 보여 몇 번 눈을 비비고 바라보았다. 착각인가?

 

"끝났다는 것은 다시 시작된다는 것을 잊는다는 것도 역시 비워둔다는 것을."

 

마지막 구절까지 부른 여우는 미친듯이 웃었다. 아, 세상천지 영원한 것이 어디있겠느냐. 막이 내린 무대에서 여우는 그저 웃고 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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