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94

업보

"넌 언제가 업보 쎄게 맞을 거다." 페트라는 얼굴을 찌푸리고 불이 붙은 서고를 보며 마른 세수를 하였다. 그리고는 여전히 웃으면서 자신을 보는 산에게 뭐라 더 말하려는 듯이 입을 벙긋거렸다. 이대로 있으면 불을 보고 나온 이들에 의해 잡힐 것이다. 근데 도망 안 가고 버티고 서서 뭐 하는 거야? "서고라 그런지 불이 더 잘 붙는 거 같지 않소?""망할 새끼야, 지금이 웃을 때냐. 도망 안 쳐?" 산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한다. 손을 스윽 내미는 그를 보고 깨달았다. 누굴 공범으로 만들 생각이야? 울컥하는 심정으로 그는 내밀어진 손을 보았다. 그래, 내가 단거리기는 해도 텔레포트가 가능하지. 그걸 생각하고 있었군. 망할, 망할 놈. 하고 페트라는 다시 욕을 퍼붓고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저 손을 잡으면 이..

1차/페트라 2025.01.17

페트산-고장난 심장

마나는 심장에 모여서 혈관을 타고 흐르며 마법을 발휘한다. 그리고 드래곤의 심장은 다른 어떤 생물보다 많은 마나를 품고, 더 빨리, 더 강하게 몸으로 보내며 마법을 발동 시킨다. 드래곤이 마법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생물인 이유이었다. 그리고 페트라의 심장은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고장나 있었다. 다른 드래곤들에게 비해서 적은 양의 마나를 품고, 제대로 마나를 흐르게도 하지 못하여 그가 마법을 쓸 때마다 오히려 피를 토하게 만들고, 폴리모드를 해도 드래곤의 모습이 일부 남아있게 만들었다. 당연히 그의 모습을 본 다른 드래곤들은 그에게 손가락질 했다. 우습게 보고, 동정했다. 부모는 그를 독립 시키지 않았다. 성룡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레어 하나 없는 비참한 용생. 부모의 과보호는 애정을 동반한 것..

1차/페트라 2025.01.17

시아온유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모든 것이 귀찮아진 것은. 부모님이 눈앞에서 악신에게 찢겨졌을 때? 동생이 무너지는 건물에 깔렸을 때? 나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악신도, 저퀴들도 죽일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 귀찮음, 무기력함은 아마 절대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겠지. 지금도 전부 모든 것이 귀찮다. 마른 세수를 하며 유하시아는 눕고 싶다는 충동을 이겨냈다. 아직 생존자가 남아있었군. 별 능력 없이 자기들끼리 뭉친 생존자들. 솔직히 생존자들이 뭘 하든 상관없다. 완전한 타인에게 마음을 쓰기에 귀찮다. 번거롭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하나 없는 맑은 날씨가 눈에 들어온다. 아, 눕고 싶다. 다시 시선을 멀리 도망가는 이들로 돌린다. 뭐, 이런 세상이니 매복과 납치는 당연하겠지. 뺏긴 식량 가방이 이리저리 흔들..

1차/시아 2025.01.17

한미

미료는 반쯤 넋이 나간 체 이제 겨우 한적해진 가게 안을 둘러보며 숨을 토해냈다. 24일 크리스마스의 밤이이었고 정말 바빴다. 겨우 가게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슬슬 마무리 할 준비를 한다. 내일은 쉬고 싶지만 일해야겠지. 하지만 내가 사장인데 내가 쉬어도 되지 않나? 이런저런 고민이 머릿속에 지나가지만 역시 생각은 내일도 일해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진짜 마무리 짓고 가자. 그릇들을 전부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고, 가게 문을 잠군 미료가 집으로 가는 길을 걸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 앞에 불쑥 나타났다. "으아아아, 조미료씨죠?!" 남자의 머리가 보라색인 것이 한결을 닮았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갑작스레 나타난 상대에 대해 경계하며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는 가방을 꽉 붙잡고 경계심..

1차/서한결 2025.01.17

귀향

사실은 어른들 말대로 우리가 혼인할거라고 생각했다. 함께 살거라고 생각했지만 너는 나와 같이 떠나자고 했다. 그건 별로였다. 나는 마을 떠날 생각 없었고 너는 귀걸이 한짝만 남기고 떠났다. 우린 서로를 거절한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서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 "이청현!!' 10년 간 쌓인 것은 멋대로 떠나버린 것에 대한 서운함이었기에 그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후려쳤다. 10년이 지났지만 어쩜 그리 변한 거 하나 없는지. 사람 좋게 웃는 얼굴에 한 번 더 등짝을 후려쳤다. "안 돌아오는 거 아니었어?""안 돌아온다는 말은 한 적 없는 거 같은데 말이지." 넉살 좋게 웃으며 때리려는 손길을 피한다. 머쓱하게 웃던 그의 얼굴에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와서 왜 돌아왔지? 이미 마음 ..

1차/이청현 2025.01.17

페트산

"산이 나한테 잘 맞지." 자리에 누워있던 페트라가 제 얼굴로 날라온 물수건을 이마에 올리며 대답했다. "그치만 넌 싫다, 이 새끼야." 산은 자신에게 툴툴거리는 페트라의 말을 넘기며 하인이 들고 온 약사발을 그의 머리맡에 두었다. 산이 손에 묻은 흙의 흔적을 지우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나 페트라는 천천히 약을 마시기 시작한다. 마지막 한모금까지 마신 그의 손에 엿가락을 쥐여준 산이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일로 쓰러졌습니까?""얘들이 용 모습 보여 달라고 해서 보여줬다가 변신 다시 하니 힘들더라. 참고로 피는 안 토했다." 지난달에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나. 아마 꼬마 하나가 숨박꼭질하다가 없어져서 찾는다고 페트라가 추적 마법이라는 걸 쓴 기억이 산의 머리에 스치고 지나갔다. 별 ..

1차/페트라 2025.01.17

면담

"안녕하세요, 당신이 이 사무실 대표인 황천룡님이 맞으신가요? 영능력자 협회 서울 " 활짝 웃으면서 다가온 상대가 의뢰인이 아닌 것은 금방 알아보았다. 보통 의뢰인들은 대게 주늑 들거나 믿지 못한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지금 들어온 그는 너무나도 편안해 보이지 않나. 법적으로 문제 일으킨 적은 없으니 13과는 아닐테고, 그러면 협회인가? 손님을 자리로 안내하며 천룡은 머리를 굴렸다. 협회에서 굳이 찾아올 일이 있나? 협회랑 엮인 일도 없었는데 무슨 일로 온거지? "얼마전 강원도의 흉가 사건으로 고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흉가 사건을 어떻게 협회에서 알고 왔지? 협회도 알고 있던 문제었나? 아니면 의뢰인이 협회 사람이랑 아는 사이었나? 근데 그거 무사히 마무리 지었는데 왜 협회에서 굳이 온거..

1차/퇴마사즈 2025.01.16

아보와 고공의 첫만남

인기척에 고개를 아래로 돌리니 어린 아이가 서 있다. 나름 산채인 이곳에 애가 있는 건 이상한 일인데, 고공은 그리 생각하면서 가지치기 하는 것은 멈추고 평과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손님이 왔나? 근처 상인들이 올 날짜는 아닌데 누구지? "길을 잃었나요?""아니요, 이모님이 근처에 계세요. 잠시 여기에서 제일 큰 어른이랑 이야기 한다고 하셔서 기다리는데 큰 나무가 보여서 무슨 나무인지 궁금했어요. 제가 일하시는데 실례를 범했나요?" 또박또박 말하는 아이의 꽤 어른스러운 대답에 고공은 잠시 놀라움에 눈을 뜨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오늘 밭에서 할 일은 다 했고 가지치기도 거의 끝났으니까 잠시 쉬는 셈 치면 되니까 괜찮다. 그보다 이모님이라니? 산적 중 누군가 밖에 가족이 있었나? 고공은 그리 생각하면..

1차/고공&의진 2025.01.15

업보

이대 제자였던 부모는 자신들의 자식이 검에 어느정도 재능이 있다는 것을 기뻐했다. 자신은 그냥 그 모든 훈련들이 힘들고 싫어서 떼를 쓰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부모보다 먼저 자신을 달래주었다. 나를 달래주기 위해서 같이 밤에 나갔던 산책들을 나는 기억한다. 얼마나 내가 당신을 좋아했던가. 애정과 동경이 가득 담긴 그 감정들은 여전히 제 심장을 뛰게 한다. 당신도 나를 언제나 사랑스럽게 바라봐주었다. 친근한 동생으로 다정하게 봐주었다. 고백하고 싶었지만 내가 속한 곳에서는 고백하면 당신에게, 부모님에게 폐가 될까 봐 하지 못했다. 그래도 함께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는데,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나를 보는 그 눈이 바뀌었던 걸까.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거리를 두고, 산책도 더 이상 가지 않고 거리를 두었..

1차/고공&의진 2025.01.15

고공 청림채 합류

심부름 보낸 부하가 알몸으로 돌아오는 것을 본 적 있는가. 파를 마을에 팔고 오라고 했더만 명색히 산적이 습격을 당해서 옷이고, 돈이고 다 뺏기고 오다니 아이고야, 이마를 감싸 안으며 유소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멱리라도 머리에 쓰고 퍼득 다녀와야겠다. 그보다 여기에 산채가 있다는 걸 아래 마을 사람들은 다 알테데 산적을 털어 먹다니 어디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인가? 그 의문은 유소가 마을로 내려가자 곧 풀렸다. 길 한가운데에서 마주친 그는 분명 자신이 부하가 입던 옷을 입고  주먹밥을 손에 들고 있다가 유소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손을 흔들어 보였다. "산채에 남아 있던 거 아니었나요?""다시 돌아가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지요.""산적이 산적을 털다니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주먹밥을 베어..

1차/고공&의진 2025.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