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모든 것이 귀찮아진 것은. 부모님이 눈앞에서 악신에게 찢겨졌을 때? 동생이 무너지는 건물에 깔렸을 때? 나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악신도, 저퀴들도 죽일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 귀찮음, 무기력함은 아마 절대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겠지.
지금도 전부 모든 것이 귀찮다. 마른 세수를 하며 유하시아는 눕고 싶다는 충동을 이겨냈다. 아직 생존자가 남아있었군. 별 능력 없이 자기들끼리 뭉친 생존자들. 솔직히 생존자들이 뭘 하든 상관없다. 완전한 타인에게 마음을 쓰기에 귀찮다. 번거롭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하나 없는 맑은 날씨가 눈에 들어온다. 아, 눕고 싶다. 다시 시선을 멀리 도망가는 이들로 돌린다. 뭐, 이런 세상이니 매복과 납치는 당연하겠지. 뺏긴 식량 가방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자신을 부르는 거 같다. 저거 놓치면 오늘은 굶어야 한다. 사실 먹는 것도 귀찮다. 하지만 자신은 몰라도 온유는 먹어야 하지 않겠나. 게다가 오늘은 크리스마스인데 뭘 먹기는 먹어야 하지 않겠나. 떨어트린 톱을 들고 도망치는 이들 중 마지막에 뒤쳐진 자를 쫓는다.
그래도 그 긴 시간 동안 신 받아들이고, 싸운 경력은 어디 안 가는지 도망가는 일반인 쯤은 금방 따라잡는다. 아무리 톱날이 몸에 닿자 소리를 지르는 상대의 머리채를 잡고 협박을 가한다. 온유가 이 꼴은 안 봐서 다행이군.
"내놔. 나도 음식 필요하거든."
머뭇거리면서도 봉투를 놓지 않는다. 동료인가, 음식인가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아, 사실은 다 귀찮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 당장 이 길바닥에 눕고 싶다. 의욕이 없다 싶다가도 이윽고 온유를 생각하니 몸이 움직여진다.
"아님, 그 봉투 안에 있는 거 반만 가져가던가. 크리스마스에는 좀 쉬자, 우리. 응?"
상대방도 그 말에 납득을 했는지 보따라 안을 뒤적여서 제법 큰 빵을 꺼내 든다. 저거 아까운데 저거 케익 대용으로 쓸려고 했는데 아쉽네. 보따리를 받고 잡고 있던 인물을 풀어주자 허겁지겁 달아가는 이들을 보니 입 안이 쓰다. 저들은 저리 살았는데 죽은 이들은...아니, 생각하지 말자. 보따라 안에 아직 남아있는 통조림과 물을 만지작거리며 그는 온유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눈은, 아쉽게 오지 않지만 그래도 오늘은 크리스마스인데 기분 내야지.
사실 날씨가 이렇게 맑은 것만으로도 어딘가 싶을 정도다. 요샌 악신이고 뭐고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대로 인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작은 희망이 심장에 엉겨 붙는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온유와 함께 어디 정착해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시아 형!"
"뭐 좀 찾았어?"
"이것 봐요."
어디 가게에서 주워온 걸까. 산타 복장을 들고 서 있는 온유를 보니 조금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무기력한 감각들이 전부 사그라진다. 물 속에 오랫동안 잠수하다가 밖으로 나온 거 같은, 공기를 갈구해 온 것 같은 감각.
"근데 그거 네가 입기에는 좀 크지 않아?"
"형이 입어주면 안돼요?"
"푸하하, 그럴까?"
"이런 세계인데도 우린 크리스마스 같은 걸 챙기네요."
"이런 거라도 챙기면서 기운 차리는거지."
온유가 보따리에서 통조림을 꺼내는 사이 시아는 대충 산타복을 몸에 걸쳐보았다. 진짜 입었어요? 하고 온유가 웃음을 터트린다. 통조림 하나를 나눠 먹으면서 눈이 안 와서 아쉽다 라든지, 트리 같은 것이 있을까, 하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눈다. 캔이 녹슬기는 했지만 안에 든 음식은 아직 무사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음식들을 먹고, 살아갈 수 있을까.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흥얼거리기 시작하는 온유의 캐롤송에 맞춰서 손뼉을 쳐본다. 난 캐롤송 다 잊어버렸는데 그는 용케도 기억하고 있었군. 오늘 진짜 하늘 맑다. 날씨도 조금 추운 거 같고 겨울 옷을 찾아 다녀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툭 벽에 기대자 무너진 벽에 휘감긴 담쟁이 덩쿨이 보인다. 아직 살아 있는지 이 날씨에도 불구하고 덩쿨은 아직 푸른 부분이 보인다.
"그러보니 형."
"응?"
"왜 그거 뭐였더라. 어디 밑에서 뽀뽀하는 그런 거 있지 않았어요?"
"아, 그거 무슨 장식물이던가?"
"그거 생각나요."
온유의 시선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담쟁이 덩쿨로 향하고 있는 걸 보았다. 그러보니 그거 무슨 나무였지, 하고 생각하는 사이 온유의 손으 시아의 목을 감쌌다. 쪽, 하고 입술을 맞추는 그 작은 행동이 귀여워서 시아는 이번에는 자신이 온유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아, 생각났다. 그거 겨우살이 나무였지. 뭐, 저런 담쟁이도 겨우살이로 쳐도 괜찮겠지. 어차피 지금 이 세상 우리 모두가 하루살이에 불가하지 않나.
"메리 크리스마스."
"네, 메리 크리스마스예요,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