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니 그곳은 축제의 한복판이었다. 알록달록한 기노모를 입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가면을 쓴 자, 손에 음식을 든 자, 흥얼거리는 자, 등을 든 자, 수많은 사람들 한 가운데에서 눈을 뜬 천룡은 눈앞의 풍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왜 여기에 와 있는거지? 분명 고요와 함께 잠들었는데 그러면 이건 꿈인가? 슬쩍 손목을 뒤로 꺾자 손목이 90도 휙 꺾이지만 아프지 않다. 꿈이군. 자각몽인가? 주위를 살펴본다. 현대의 풍경이 아닌 영화에서나 보던 옛날 가옥, 그것도 한국이 아닌 옛날 일본 풍경의 마을이다.
자신의 주위에 일본이랑 관련된 건 토키뿐인데 생각을 하는 사이 걸음을 옮겨본다. 꿈인만큼 지나가는 이들의 얼굴이라든가, 뭔가 세세한 것들은 두리뭉실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치만 분위기가 너무 즐거워서 자신도 여기가 꿈인 걸 잊을 것만 같아서, 천룡은 주위를 좀 더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그리하여 그 걸음 끝에 도착한 곳은 신사였다. 긴 계단 위, 붉은 토리이를 지나 도착한 신사 앞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신사 앞마당에는 캠프 파이어 마냥 장작을 쌓아놓고 그 주위를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그 사이에서 눈에 들어오는 하얀색이 보였다.
하얀 옷과 하얀 여우 가면을 쓰고, 하얀 백발 머리를 휘날리면서 춤 추는 것. 하얀 꼬리 아홉개가 흔들린다. 설마, 아니겠지? 싶어하는 사이 그것은 소리 내어 웃으며 그는 자신을 지나쳐 뒤에 서 있는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차려 입은 복장으로 보니 저 남자가 이 신사의 신관인 거 같다.
"즐겁습니까?"
"즐겁지, 즐겁고 말고, 나는 그대들 모두를 사랑하니까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즐겁지."
그 대사가 자신이 아는 그 여우와 너무나도 달라서 천룡은 저도 모르게 뭐야, 이 꿈? 하고 소리 내서 말하고 말했다. 주위에 모든 소리가 뚝 끊기고 모든 시선들이 천룡이에게로 향했다. 친입자를 보는 거 같은 차가운 눈. 언젠가 한 번 들었던 괴담 속처럼 자신을 보는 그 시선에 천룡은 꿈에서 깨기 위해 자신의 뺨을 내려쳤다.
시야가 아주 잠시 암전 되었다. 꿈에서 깨어나는 거 같은 감각이 찾아왔지만-.
'망할.'
다시 눈을 떴지만 여전히 자신은 신사 앞이었다. 다만 달라진 것은 깔끔해진 신사 앞에 한무리의 인간들이 저마다의 짐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누군가가 기도를 하면서 말한다. 꼭, 다시 돌아올테니까, 마을을 떠나는 저희를 용서하십시요, 조곤조곤한 기도와 새전함에 들어가는 얼마 안 되는 푼돈.
이윽고 그들이 떠나고 하얀 여우만이 남았다. 풍경은 곧 변한다. 영상을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해가 지고, 뜨고, 달이 지고, 뜨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낙엽에 떨어지고, 새싹이 돋고, 신사가 낡아가고, 도리이가 무너진다. 여우는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린다. 무표정한 얼굴로 기다린다.
그렇지만 찾아오는 이는 흥미로 놀러오는 이들뿐이다. 신을 존중하지 않는 이들. 여우의 하얀 머리카락과 꼬리 끝이 검게 변하기 시작한다. 울분이, 외로움이 쌓여 일그러진다. 마침내 웃음을 터트린 그날 여우는 제 땅에 들어온 겁없는 이들을 공격했다.
그리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수백번의 태양이 지고 달이 떠오른 날.
그들이 왔다.
반쯤 겁게 변하 여우에게 속삭였다. 당신이 원하는대로 떠난 이들을, 그들의 후손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속삭임.
눈을 감았다가 뜨자 그곳은 비행기 안이었다.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는 토키와 그 뒤에 서 있는 검은 여우가 보인다. 노란 눈은 피처럼 붉게 변해서 그는 잠든 토키를 보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건 항상 도망쳐버리는군. 아, 나는 그냥 돌아가고 싶은거였는데. 이젠 고향 땅도 못 밟겠군. 원망스러워라.
붉게 변한 여우의 눈동자와 마주친 거 같았다. 천룡은 뒷목을 꾸욱 눌리며 다시 한 번 제 뺨을 내려쳤다. 이번에는 아픔이 느껴졌고,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꿈에서 깨어났다.
"벌써 일어났어?"
익숙한 고요의 품이다. 자신을 안아서 토닥이며 책을 읽고 있던 고요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천룡은 몸을 일으켰다. 낮잠 한 번 잤다가 거하게 이상한 꿈을 꿨군. 물론 토키에게 사정 이야기를 들었기에 놀랄 건 아니지만. 부엌으로 가 물을 한 잔 마시다가 옆을 보니 언제 왔는지 여우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신기 있는 놈들은 이래서 재수 없어.
"누가 보고 싶어서 본 줄 알아?!"
-하, 설마 동정하는 건 아니겠지. 불쾌하다.
솔직히 말해서 직접 봐버린 이상 동정심이 든다. 하지만 이 자식이 토키한테 한 일을 생각하면 동정과 용서는 별개의 문제다.
"너 혹시 토키한테서 떨어질 수 있다면 얌전히 있을 수 있냐?"
그렇지만 그렇게 돌아가고 싶은거면 재수 없어도 토키를 위해 그래 줄 수 있다.
-내가 쿠타미 가문의 혈통에 묶여 있어서 고향에 못 가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풀려나자마자 헤벌레 하고 고향으로 갈거라고 생각하나?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냐?"
-당연히 있지. 쿠타미 가문도, 약속 하나 지키지 않은 그 멍청한 놈들의 피를 이어 받은 놈들 하나 하나 씹어먹는 일을 하고 싶지.
망할, 여우새끼 역시 동정과 용서는 별개다. 평소처럼 구슬을 꺼내 던지자 낄낄거리며 그대로 사라진다. 거실에서 고요가 어리둥절하는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며 급격히 다시 피곤함이 밀려와 천룡은 그 품에 얌전히 안겼다.
"여우랑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망할 여우 새끼."
혀를 차며 천룡은 고요를 꼬옥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