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름을 천룡도 전에 들어 본 적 있었기에 그는 그것이 들리자마자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있을 고요를 보았다. 먼 곳을 보며 흔들리는 눈동자가, 적을 두고 걸음을 돌리려는 그를 붙잡게 했다. 그의 귀를 막고 눈을 마주친 상태로 천룡은 부름을 물러나게 했다.
"어디 정신 놓고 있어! 날 봐!"
흐려지던 눈동자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미안, 하고 덧붙이는 고요가 검을 다시 잡고 앞으로 나선다. 부름은 끊겼지만 천룡은 알고 있다. 이 부름은 10년 전에도 몇 번 들었다. 그때마다 고요는 자신과 약속이 있던지, 길드에 일이 있던지 어디론가 훌쩍 갔다가 며칠만에 돌아오고는 했다.
어디에 다녀왔는지 말하지 않았다. 길드에서도 어디에 가는지 아는 거 같지만 자신에게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 당시 어린 자신은 그대로 고요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불안감에 시달렸다. 지금은 불안감보다는 보지도 못한 그 신이 짜증날 뿐이었다. 천룡은 신들의 애정이 어떤 건지 지겹도록 시달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너, 그 부름 괜찮은거냐?"
그래서 임무가 끝나자마자 천룡은 고요에게 질문을 던졌다. 질문을 받은 고요는 잠깐 말 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같이 가볼래?"
딱히 가보고 싶지 않지만 천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을 가지 못하게 막는 길드도 없겠다,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그는 고요와 함께 가기로 하였다. 가벼운 짐가방을 들고 고요와 함께 기차에 올라탔다. 덜컹거리는 기차를 한참을 달렸고 중간중간 내리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몇 시간을 달릴 쯤 반쯤 잠들어 있던 천룡을 고요의 손길을 깨웠다.
"야, 나 기차 안이었지?"
"응."
방금전만 해도 자신이 분명이 기차에 있었던 걸 인지하고 있었는데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산길이었다. 정확하게 사람이 다니는 길 하나 없는, 산 한 가운데 말이다. 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 산 속을 고요는 익숙하다는 듯이 걸어가기 시작했고 천룡은 딱히 그렇게 큰 위험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그 뒤를 따라가 수풀을 헤치고 가자 그곳에는 저택이 있었다.
고아한, 옛날 조선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기왓장 저택의 대문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열려 있었다.
"오늘은 마중을 안 나오셨네."
"평소에는 나와?"
"나오시지."
대문을 넘자 어디선가 끼익, 소리가 났다. 조용하고 인기척 없는 공간은 두 사람 들어오자 불이 켜졌다. 어디선가 향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고요는 익숙하게 방을 찾아 갔다.
"역시 안 나오시네."
"내가 있어서 그러는 거 아냐?"
천룡은 장난스레 말하였다. 특유의 자신의 기에 경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고요는 그 말에 그런가, 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서 방 한가운데를 보니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밥 한그릇, 온갖 나물과 생선이 있는 밥상. 한그릇? 고요가 소리 내서 말하자 그제야 아차, 라고 말하는 듯이 발치에 밥 한그릇이 더 나타났다.
"널 싫어하는 건 아닐거야."
"오~냐."
툴툴거리는 것처럼 대답하기는 했지만 천룡은 이 공간에 살의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약간의 호기심, 약간의 흥미가 섞인 시선이 느껴진다. 내 기 때문에 못 나오고 있나보지. 식사는 제법 맛있었고 식사가 끝나고 나서 둘은 정원을 산책했다. 가을이라 그런지 낙엽이 발 밑에서 사각, 사각 소리를 내는 가을 정원은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연못도 있네."
"안에 물고기 있을 걸."
"점심에 먹은 생선 여기서 잡은 건 아니겠지?"
생각해본 적 없는지 고요가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어깨를 으쓱한다. 뭐, 산에서 잡아온거든, 연못에서 잡은거든 무슨 상관인가. 천룡은 슬쩍 고요의 손을 잡았다. 움찔하는 것이 느껴져서 천룡은 더 강하게 꼭 붙잡았다.
"신님이 보고 계실건데, 그러니까-."
"그래서 싫어?"
"아니."
고요의 얼굴이 빨게지는 것이 보인다. 하여간 일 할 때에는 그렇게 찬바람 불면서 이럴 때에는 참 말랑말랑하단 말이지. 아, 그러면 이런 표정을 보는 건 나뿐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천룡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 낙엽으로 가득하던 정원에 꽃들이 피어났다. 분홍색, 노란색, 하얀색, 주황색 온갖 꽃들이 사방에서 피어나면서 꽤 향기로운 향이 맴돌았다. 옆에서 고요가 신님이 널 좋아하나 봐, 같은 소리를 한다.
"어쩌다가 연을 맺게 된거야?"
"어릴적에 영가들에게 쫓겨서 산에 들어왔다가 그, 토끼가 다쳐 있길래 내가 도와줬는데 그게 신님이었어. 날 데려가셨는데 내가 돌아가겠다고 떼쓰니까 돌려보내주셨는데 또 오라고 하는 거 알았다고 했지."
"맹약을 나눴군."
"어릴적에는 몰랐지."
"신들이라는 것이 다 그렇지."
옆에 활짝 핀 보라색의 장미랑 비슷해 보이는 꽃을 꺾어 고요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이거 리시안사스네."
"외국 꽃이야?"
"그럴 걸. 내가 종종 꽃을 가져오면 다음에는 정원에 피어져 있더라."
"산신이라 그런가."
"그런가 봐."
고요가 옆에 있던 다른 분홍꽃, 천룡이의 기억이 맞다면 백일홍을 꺽어 자신이 천룡의 머리 위에 꽂아주었다.
"꽃말 같은 거 잘 알아?"
"아니, 넌 알아?"
"모르면 뭐 됐어."
고요가 장난스레 웃는 것을 보니 그리 나쁜 뜻은 아니겠지. 그 뒤에도 평화로웠다. 연못에 물고기에게 밥이나 주면서, 현대 최신 소설부터 시작해서 낡고 오래된 서책까지 있는 서재에 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시간은 밤이 되었다. 서재에서 찾은 책을 읽고 있던 고요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을 때 천룡은 기척을 느꼈다.
잠든 이를 깨우지 않겠다는 듯이 조용히 열린 문 넘어에는 가면이 있었다. 하얀색의 하회탈럼 보이는 그것은 공중에 둥둥 떠서 천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회탈이 웃었다. 어차피 웃고 있는 형상인데 웃었다는게 좀 이상하겠지만 적어도 천룡이는 그렇게 느꼈다.
좋은 아이구나.
웃으면서 신이 말하였다.
"감사합니다."
좋은 아이, 착한 아이는 좋아. 재미있고 즐거우니까. 그치만 기는 너무 쎄네. 그래도 좋은 건 좋지.
하회탈이 공중에서 빙그르르 돈다. 그리 장난스레 말하고 다시 문이 닫혔다. 주위가 무척이나 조용해졌다. 조용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간. 천룡이는 잠든 고요의 귓가에 속삭였다.
"데리고 와줘서 고마워."
머리에 꽂은 꽃에서 무척이나 향기로는 향이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