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가면

귀향

notion5846 2025. 1. 11. 00:06

"이야, 오랜만이네요. 아니다,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이죠."

 

쾌할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헤르난즈는 손에 들린 캔커피를 마저 비워냈다. 이곳은  몇 년 전 왔을 때랑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바닷가를 왔다 갔다 하는 부지런히 움직한 어부들과 상인들, 그 넘어로 보이는 돌로 이루어진 흙길과 비슷비슷하게 생긴 집들. 지겹도록 들은 갈매기 우는 소리가 울리는, 폰 델리안의 고향이다.

 

헤르난즈도 이곳에 온 적 있다. 명절에 고향에 안 가고 본부에 있을거라는 자신을 끌고 폰이 이곳에 들린 적이 있었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시골의 풍경을 배경으로 가면은 척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분명 처음 왔을텐데, 이전에 폰이 그랬던 것처럼 앞장 서서 걸어가는 것이 불쾌하다. 불쾌하면서도 그리움에 헤르난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올거예요?"

"너 진심이냐?"

"진심이죠."

 

돌아선 가면의 입이 쭈욱 찢어진다.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헤르난즈는 바로 얼마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가면이 갑작스레 폰의 고향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고향에 가족이 있지 않냐는 그 질문에 대답해주다가 문득 폰이 임무 중에 순직하였다는 소식을 전했으면 몸은 가면이 쓰고 있다고 전부 다 전했다. 근데 이제 외서 찾아가겠다고? 무슨 생각인지. 그렇다고 혼자 보낼 수도 없어서 따라왔지만 만나는 걸 상상하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앞장 서서 걷던 그의 걸음이 빨라지더니 방향을 옆을 가르켰다. 낮은 돌담 넘어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풀들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풍경을 가면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 들판에 관한 기억이라도 있나? 다시 바람이 불자 바스락소리가 파도처럼 흩어진다. 어느새 가면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잔잔한 멜로디는 처음 듣는 노래었다. 자신이 모르는 걸 보니 이 지역 노래인가보지.

 

"헤르난즈 대장님?"

 

헤르난즈의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흥얼거림이 멈추고 가면과 헤르난즈의 고개가 돌아갔다. 갈색 머리를 길게 기른 사내가 바구니를 든 상태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거 같네요. 여기 어쩐 일이세요?"

 

폰과 똑같은 갈색머리를 높게 묶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린다. 폰과 다르게 동글동글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그런 부드러운 눈매가 헤르난즈의 등 뒤에서 고개를 내민 가면과 눈이 마주치자 일그러진다. 황급히 돌아본 가면은 어느새 폰 델리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게 미쳤나, 그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상대가 입을 열었다.

 

"그놈입니까? 제 형을 잡아먹은 놈이?"

"잡아 먹었다니, 거래였다고."

"왜, 그거랑 같이 있습니까?"

 

그 질문에 가면이 옆에서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그거야 폰 델리안 자리가 비워져 있으니까."

 

바구니를 집어 던진 델리안이 가면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바닥에 던지고는 주먹을 후려치며 소리를 지르는 것을 헤르난즈는 뒤늦게 손을 뻗어 진정 시켰다. 역시 오는 걸 말려야 했다고 생각하면서 본 가면은 폰 델리안의 얼굴을 하고서 웃고 있었다. 한바탕 땅을 구르고 난 뒤에 바구니를 다시 주워 든 청년은 헤르난즈와 가면을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빨리 가십시요. 오늘은 못 재워드리겠네요."

 

저렇게 화를 내는 것 기분을 알 것 같다. 분명 죽었다고 생각한 이의, 가족의 몸을 툭 튀어나온 이상한 존재가 쓰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기분 나쁘다. 자신을 특히 이 녀석처럼 히죽히죽 웃어대고 있다면 더 그렇겠지.

 

"너 여기까지 와서 맞으려고 왔냐?"

"하하, 그치만 직접 보고 실감하는 쪽이 더 낫잖아요."

"뭐가 더 나아."

"서신으로만 덜렁 보내면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이 있는 게 사람이라구요. 헤르 당신도 가끔 나를 보면서 폰을 생각하면서도 나를 폰으로 보지 않으려고 하잖아요? 그게 좋은거예요?"

 

헤르난즈는 손을 들어 폰의 머리를 한대 내려쳤다.

 

"그걸 하려고 휴가까지 내면서 이 시골로 온 거냐?! 배는 이제 더 없는데 오늘 밤은 어디서 자려고!"

 

킬킬거리며 어느새 다시 얼굴을 가면의 형태로 되돌린 그가 담을 넘어 들판을 가로 지르기 시작했다. 다시 콧노래를 들으며 헤르난즈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라갔다. 가면의 걸음의 끝에 있는 것은 작은 오두막이었다. 낡고, 아무도 안 썼는지 먼지가 폴폴 날리지만 그래도 가구도, 통조림도 남아 있는 오두막.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여기 사유지냐?"

"아뇨, 굳이 말하자면 폰의 아버지가 애들 놀면 여기서 쉬라고 만든 곳인데 폰이 죽고 안 썼나보네요."

 

통조림 따개를 찾아낸 가면이 다시 콧노래를 부른다. 더 따지기도 힘들다, 헤르난즈는 먼지투성이 소파에 주저 앉았고 가면은 익숙하게 캐리어에서 주전자와 커피를 꺼내들었다.

 

"넌 친절한건지, 멍청한건지 모르겠군."

"당신이 좋을대로, 당신이 보고 싶은대로 보면 되요."

 

구석에 쌓인 장작들이 벽난로로 던져진다. 이윽고 붙기 시작한 불을 노려보며 헤르난즈는 저 멍청이랑 다시는 여행 안 가, 그 생각을 하며, 은은한 커피향을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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