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가면

헷갈려하다

notion5846 2025. 1. 11. 00:22

서쪽의 어느 나라에는 페러트안들이 많이 살고 있다. 국가가 그들의 본체를 관리하고 생전에 미리 허가를 받은 이들이 죽을 때가 되면 페러트안에게 몸을 넘겨서 숙주의 삶을 이어서 살게 한다. 일생 자신의 삶이라고는 없는 인생이다. 그렇기에 그는 도망쳤다. 몸이 생기자마자 그 나라를 나와서 여행을 했다. 온전한 나의 삶이 갈구했다.

 

"헤르난즈 대장이 너 엄청 싫어하는 거 알지?"

"압니다."

"근데 용케도 폰 상사의 몸으로 지내고 있네."

"하하하, 그러네요. 아, 그거 헤르난즈 대장에게 줄 서류인가요?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그토록 나의 삶이 필요했는데 지금 나는 그렇게 싫던 타인의 삶을 살고 있다. 하하, 어쩌겠나. 그날 그 해변에서 당신을 만나는 걸로, 폰의 감정이, 기억이 나를 지배했다. 나는 거기에 굴복했고, 거기에 내 몸을 맡겼다. 이상할 거 없다. 페러트안의 삶이란 그런거지.

 

"헤르난즈, 서류 가져왔습니다."

 

자신을 보지도 않고 서류를 가져가는 그녀의 책상에 놓인 컵이 비어 있는 것을 보였다. 폰의 기억대로 능숙하게 컵을 들어 책상 맞은편에 있는 주전자로 손을 뻗었다. 미리 끓여 놓은 뜨거운 물이 든 주전자를 들고, 여과지와 원두를 꺼내서 커피를 내린다. 향긋한 커피향이 퍼진다. 폰의 기억이 입을 통해 멋대로 떠든다.

 

"그러고 보니 헤르는 각설탕 2개였지?"

 

등 뒤에서 종이를 넘기던 소리가 멈추고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지만 돌아보지 않고 설탕 단지를 노려보았다. 이 기억이 맞나? 아닌가? 각설탕 2개에 우유 없이. 언제나 늘 같은 시간 마시던 원두 커피의 기억.

 

"무슨 소리지? 나는 설탕 안 넣는다."

 

등 뒤 목소리에 담긴 노기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다. 여전히 등을 돌리고 최대한 밝은 목소리, 폰의 목소리를 흉내 낸다.

 

"취향이 그 사이 바뀌었나 봐~. 하긴 취향은 바뀔 수 있지. 가 오래 자리를 비웠으니까."

 

그녀의 말대로 아무것도 넣지 않은 블랙 커피를 들고 뒤돌아 섰다. 의자가 넘어진 적 없다는 듯이, 아까처럼 침착하게 앉아서 서류를 검토하며 자신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책상 위에 커피를 내려놓고 그 옆에 설탕 단지를 내려놓았다. 은은한 커피 향이 감돌고, 펜이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만이 울린다. 아, 이 풍경, 이 향기 폰의 기억 속에도 있는 것이다. 익숙한 그리움에 마음에 편해진다.

 

어쩌면 제 안에 아직 폰이 살아 있을지도 모르지. 자신이 그를 삼킬 때 그가 숨이 끊어졌는지, 아닌지 확인하지 못했으니까. 어쩌면 아직 제 안에 그가 살아 있어서 자신이 강하게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가설 같은 건 입에 담지 않는다.

 

그녀가 자신에게 보내는 감정들은 폰을 향한 그리움과 혹시 아직 그가 제 안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미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에게 보내는 감정이 아닌 폰에게 보내는 감정.

 

"너, 그러보니-."

"왜요, 헤르?"

"왜 그렇게 나를 부르지?"

"원래 이렇게 불렀잖아요?"

 

정확하게 자신이 아니라 폰이 그렇게 부른거지만 아무렴 어때. 가면은 능청스레 대답하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커피를 마신 헤르난즈가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 부르지 마라."

"싫어, 헤르?"

 

고개를 휙 돌린 그녀가 손을 뻗어 멱살을 잡아 당긴다. 허리가 굳혀지고 얼굴이 코앞에 닿을 듯 가까워진다. 낮은 으르렁거림이 귀를 파고 든다. 분노다. 폰이 아닌 자신을 향하는 분노. 그래, 이거다. 오로지 나의 삶, 나를 향한 감정.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받아 들여도 제 안의 폰의 기억과 감정에 의해 기쁘다. 그녀가 나를 미워해도 그것은 나를 향한 감정이기에 기쁘다.

 

"그렇게 부르지 마라."

"그러면 어떻게 불리기 원하는데?"

"넌, 그의 후임으로 들어온거니까 예를 갖춰서 부르는 건 어떤가?"

"네네, 헤르 대장님."

"전혀 들은 생각이 없는거냐, 네놈."

"맞춰보시죠."

 

크게 내쉬는 한숨 소리에 결국 웃고 만다. 마치 관심을 끌려는 어린아이처럼 자꾸만 당신을 놀리게 되고, 화내게 만들게 되버리는 것이 이미 죽었을 숙주에게 조금은 미안하지만 어차피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 않는가.

 

"난 아직, 헷갈리지 않았어."

 

서류를 들고 나오면서 집무실을 나서면서 들리는 작은 중얼거림에 하하, 다시 웃음이 새어나온다. 괜찮아, 헤르난즈. 당신이 결국 나와 그를 헷갈려하고, 섞어서 생각해도 그 또한 내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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