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료는 반쯤 넋이 나간 체 이제 겨우 한적해진 가게 안을 둘러보며 숨을 토해냈다. 24일 크리스마스의 밤이이었고 정말 바빴다. 겨우 가게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슬슬 마무리 할 준비를 한다. 내일은 쉬고 싶지만 일해야겠지. 하지만 내가 사장인데 내가 쉬어도 되지 않나? 이런저런 고민이 머릿속에 지나가지만 역시 생각은 내일도 일해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진짜 마무리 짓고 가자. 그릇들을 전부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고, 가게 문을 잠군 미료가 집으로 가는 길을 걸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 앞에 불쑥 나타났다.
"으아아아, 조미료씨죠?!"
남자의 머리가 보라색인 것이 한결을 닮았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갑작스레 나타난 상대에 대해 경계하며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는 가방을 꽉 붙잡고 경계심을 잔뜩 세웠다.
"우리 형 좀 말려줘요!"
"형이요?"
"그, 그, 아니,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 갑자기 나타나서 죄송해요! 저는 서한결의 동생인 서 한이예요!"
그러보니 한결에게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역시 낯선 사람을 따라가는 건 위험한 일 아닌가. 머뭇거리는 미료를 보던 남자는 굉장히 곤란하다는 얼굴을 지어 보이더니 이윽고 급히 휴대폰을 꺼내 미료에게 보내주었다. 바탕 화면에 찍힌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의 한결과 함께 찍힌 상대의 모습에 미료는 크게 숨을 들으켜 쉬었다.
"어디로 갈건데요?'
"형, 원룸이요!"
목적지를 들은 미료는 한을 두고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걸까? 하지만 보통 그러면 경찰을 불러야 하지 않나? 지금이라도 경찰을 불러야 하나? 말려야 한다면 뭐를 말려야 한다는 걸까. 오늘 하루 종일 일한다고 움직인 팔다리가 삐걱거리는 거 같다.
익숙한 원룸 입구가 보이고 망설일 거 없이 기억 속에 서한결이 지내고 있는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문을 열려 있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뒤집어진 선반과 흩어진 물건만이 여기서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말하고 있을뿐이었다. 뒤늦게 쫓아온 서 한이 없어요? 라고 묻자 미료는 거기에 끄덕이다가 옥상을 떠올렸다. 전에도 서한결이 옥상 난간 위를 걷다가 자기한테 걸린 것이 생각났다.
진짜 서 한이 옆에서 뭐라고 하는지 듣지도 않고 그녀는 엉망이 된 방을 뒤로 하고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활짝 열린 옥상문 넘어 난간 위에 익숙한 형체가 보여 조미료는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한결씨."
휘청거리던 몸이 가볍게 빙글 돌더니 미료를 바라보며 멈추었다.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비틀거리지만 미료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가게 끝났어?"
"오늘 정말 바빴어요. 한결씨는 어땠어요?"
"오늘?"
"오늘요. 집이 아주 엉망이더라구요."
미료가 내민 손을 보던 한결이 다시 난간 위에서 빙글 몸을 한바퀴 돌린다. 용케도 떨어지지 않고 저 위에 있는다 싶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서 서 돌던 한결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숙였다.
"아니, 그렇게 엉망인가?"
"도둑이라도 들었어요?"
"아니, 아버지가 오셨어."
"어, 한결씨 아버님이랑 사이 안 좋다고 한 거 같은데 맞죠?""
"그렇지? 별 건 아니고 내가 동생 상견레에 안 간 걸로 화내려 오셨더라구. 날 싫어하면서 왜 그런 체면 같은 거 챙기고 싶어하시는건지 모르겠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때렸어요?"
"아버지가 먼저 손을 들었어. 그냥 나는 아버지 앞에서, 조금 내 마음대로 했을 뿐이야."
"경찰 부를까요?"
"그런 건 아냐. "
그제야 한결은 미료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왔다. 가까이 다가오자 그제야 한결의 입술이 부어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경찰을 부를 일이었나 싶어 심각한 표정이 된 미료를 보며 한결은 긴 한숨과 함께 얼굴을 감쌌다. 젠장, 하고 나지막한 욕설이 옥상에 울렸다.
"무슨 상황인지 간결하게 말해줄래요?"
"나는 미친놈이야."
"아니다, 차례대로 말해줘요."
"나는 미친놈 맞아. 나는 양심 없어. 농담 아니니까 웃지마. 나는 재미를 이상한데에서 느끼니까."
"어떤 것에 느끼는데요?"
"불법적인 일도 좋아. 할 수 있다면 귀찮은 일만 생기지 않으면 나는 할 거야. 그러니까, 난 이탈을 즐겨. 양심의 가책이 없는 쓰레기지. 지금까지는 계속 나름 잘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범죄 저지른 적 있어요?"
"맹세코 없어."
"방금 아버님이랑은..."
"아버지가 주먹 들었길래 내가 먼저 핀트 나가는 꼴 보고 싶냐고 선반 던졌어. 경찰 부를 일은 아냐. 그리고 네가 싫다고 하면 이상한 짓 안 해."
이거 꼭 드라마에 나오는 사이코패스의 고백을 드는 거 같다고 미료는 생각 햇다. 그리고 동시에 강아지 마냥 추욱 늘어진 한결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 범죄 이력도 없으니까 그녀는 숨을 토해냈다.
"그거 알아요?"
"어어?"
"저 문 닫자마자 지친 몸으로 여기까지 뛰어 왔다구요. 지금 팔다리가 얼마나 쑤시는지 알아요?"
"근데 여기 어떻게 온거야?"
"서 한씨가 저를 부르려고 왔어요"
계단에서 미안! 하고 말하는 서 한의 목소리가 들리자 한결이 야! 하고 소리를 빼액 지른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보니 바로 도망친 모양이다. 미료는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내일 가게 문을 여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브날부터 이렇게 애인을 고생 시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미안."
"오늘은 한결씨 집에서 잘 거니까 각오 하라 구요?"
뭘? 하고 묻는 거 같은 한결의 뺨에 입을 맞춰주고 미료는 그의 손을 잡고 옥상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