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진은 살면서 자신과 같은 머리색을 본 적 없었다. 새외에서 온 할머님의 어머니가 분홍 머리카락을 가졌다고 들었지만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가족들 모두 옅은색이거나 검은색이었다. 그렇기에 의진은 자신과 같은 진한 분홍 머리를 가진 청년의 방문에 놀라움을 느꼈고 이윽고 청년이 담을 넘어 들어왔다는 사실에 손이 자연스레 검 손잡이로 향했다. 적의는 없다. 오히려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말한다.
“저를 아십니까?”
간절하게 애원하는 거 같은 목소리에 의진은 긴장했던 몸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흔들었다. 비틀거리던 청년은 작게 뭔가를 중얼거리는 거 같았지만 여전히 누군지 몰랐다. 혼란에 빠진 인간이 순간적으로 무슨 짓을 하는지 잘 알기에 의진은 거리를 벌리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내는 그런 의진을 보더니 짧은 한탄 같은 소리를 내고는 다시 등을 돌려 달려나갔다.
“잠깐 기다립시요!”
그 뒤를 언제 왔는지 고웅이 쫓아가는 것을 보며 의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목에 감긴 목도리를 만지작거렸다. 의안함과 함께 찾아 온 그 청년은 곧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오늘부터 원호단에서 단주님의 심부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웅의 옆에서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청년의 머리카락은 검정색이었다. 염색한건가? 의진은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짓다가 그에게 인사를 건냈다.
“아, 혹시 얼마전에 찾아온것도 고웅이랑 짜고 놀리려고 한 거 아니예요? 나참, 진짜 놀랐다구요.”
“네, 뭐, 당신이 놀랐다면 성공이네요.”
“이름이 고공이라고요? 고웅, 고공, 혹시 둘이 형제예요?”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을 합니까. 실례되는 말 좀 하지마세요. 애시당초 고웅은 도호잖습니까?”
옆에서 살짝 미소 짓고 있던 청년이 작게 죄송했습니다, 하고 사과의 말을 건낸다. 공기 묘하게 무거운 거 같아서 의진이 괜히 웃으며 제 목도리를 만지며 웃었다. 어서와요, 그 인사에 청년은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고웅은-
“고웅, 화났어?”
“뭐요?”
“얼굴 가리고 있어도 그정도는 눈치 챌 수 있거든요!? 아, 설마 닷새전에 금창약 가져다가 쓴 걸로 화내는건 아니죠?”
“말도 없이 가져간 게 당신이었습니까?!”
“분명히 가져간다고 옆에 있는 분에게 말씀 드렸는데 못 들었어요?”
“장부에 적고 가져가십시요!”
씩씩거리면서 떠나는 고웅의 뒤로 청년이 뒤쫓아갔다. 원호단이면 자주 마주치겠네, 라고 생각한만큼 청년은 자주 의진의 시야에 들어오고는 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보니 청년은 고웅처럼 면사를 둘렀다. 눈 아래, 입을 가린 면사. 마치 내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 모습에 의진은 버릇처럼 목도리를 만지작거렸다.
“둘이 사이가 좋네요.”
“좋아 보입니까?”
“어디서 그런 참한 청년을 찾았데요?”
“우연히 소개 받았습니다.”
“운이 좋았네요!”
“의진, 이런 질문 실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목도리 어디서 난겁니까?”
전에 말했던 거 같은데 말 안 했나? 의진은 제 목에 두른 푹신한 털 목도리를 흔들어 보였다. 어디서? 어라, 누구한테 받았더라?
“사형제들에게 받았던가? 그랬을걸요?”
“혼인 한 적 있습니까?”
“엑, 고웅, 저 나름 도사거든요? 물론 어렸을 때 눈 맞은 적은 있지만 그건 철 없을 시절이고 딱히 별 일도 없이 헤어졌는 걸요.”
“별 일 없었군요.”
“없었죠. 손만 잡고 연애했으니까요. 고웅답지 않게 뭘 그리 물어요? 물론 고웅이라면 대부분 다 답해줄거지만요.”
“아뇨, 별 거 아닙니다. 그냥 뭘 좀 찾고 었습니다.”
그리 말하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면사로 가려져 있지만 묘하게 화내는 거 같이 느껴져서 의진은 의안함을 느꼈다. 뭘 찾고, 뭐에 화를 내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묘하게도 심장이 술렁거린다. 술렁거림은 며칠 내내 계속 이어졌다.
“비가 엄청 오네. 나참, 여름도 아닌데 무슨 비가 이리 온다.”
고웅에게 가서 차라도 마실까 싶어서 다과를 꺼내서 가는 길이었다. 고웅의 방까지 가는 길에 빗소리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괜찮습니까. 악몽을 꾸는 거 같아서 깨웠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졸았나보군요.”
그 청년이랑 같은 방을 쓰나? 아님, 청년이 고웅의 방에 온 걸까. 발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버리자 목소리가 좀 더 명확하게 들려왔다.
“고웅 대협, 저를 기억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아직 기억합니다.”
“고웅 대협, 아무래도 역시 저는 떠나야겠습니다.”
빗소리에 묻힌 목소리가 울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이었다.
“당신마저 저를 잊으실까봐 두려워하는 건 여기까지 해야겠죠.”
그 발언에 참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어디로 가는데요?”
이윽고 세계가 뒤집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