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피의 양을 보니 살기는 글러먹었군. 고공은 눈을 뜨고 앞을 보았다. 시야는 아직 멀쩡하다. 오른쪽 손에 감각은 없지만 그래도 움직여지고, 옆구리가 쑤시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다. 시시각각 죽음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 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숨을 고르고 있는 아이가 불안한 눈으로 금창약을 꺼내려는 것을 고공은 제지하였다. 이꼴로 약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아보, 아직 놈들의 포위망이 완전히 좁혀지지 않았을겁니다. 시간만 끌면 당신 하나쯤은 빠져나갈 수 있을겁니다."
"싫어요."
"싫다고 고집 부릴 일은 아닐텐데요? 지령서를 무사히 전달하는 게 우리 일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닐텐데 고집 부리지 마세요."
몸을 일으켜 본다. 아직, 살아있다. 그는 자신과 비교해서 멀쩡한 상태인 아이에게 품에 있던 연통을 꺼내서 내밀었다. 싫어요, 하고 다시 돌아오는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손에 쥐여주었다. 폭포 뒤에 잘 숨겨진 동굴이라고 해도 여기까지 오면서 흔적을 제대로 지우지 못 했으니 금방 쫓아올 것이다.
"지금은 전쟁 중이고 당신이나 나나 스스로 의지로 전쟁을 참가했잖아요? 우리가 져야할 책임이 있잖아요."
잠시 말이 없던 아이가 일어난다. 이제 아이라고 부르기에도 훌쩍 컸지만 자신에게는 아직도 아이처럼 느껴지기는 한다. 고공은 다리에 힘이 완전히 빠지기 전에 고공은 먼저 밖으로 나갔다. 삽이 부러져서 아쉽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허리춤에서 오랜만에 검을 뽑았다. 이런저런 미련들이 생각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다가오는 추격자들의 기척에 자신도 기척을 내면서 그는 폭포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사실은 기쁘다. 일생 자신의 마지막 죽음은 타인의 미움과 증오 속에서 죽고 싶었으니까 그 점은 조금 기쁘다. 이런 걸 저 아이가 알면 좀 질색하려나. 그런 실 없는 생각을 하면서 쫓아오는 이들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죽고 나면 사후가 없으면 좋겠는데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짜증날 거 같다.
죽음이 눈앞까지 다가온다. 어차피 오래 버티지 못하는 몸이었다. 시야는 어두워지고, 무감각이 온몸에 퍼진다. 그러보니 사람이 죽어도 청각은 어느정도 남는다고 했던가? 그 말이 진짜인지 몰라도 소리가 들린다. 웅성거리는 적들의 목소리와 자신의 목에서 나올 신음소리가 귀를 괴롭힌다 싶더니 이윽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있잖아요, 아보. 그날 나는 딱히 마중 없이 저 세상으로 갔어요. 다른 걸 돌아볼 생각도 없었어요. 그렇게 저 세상에서 환생하기 싫다고 난리 치다가 뒤늦게 당신이 다시 돌아왔다가 내 옆에서 죽은 걸 알았어요. 당신은, 다른 차사가 이미 인도한 뒤었지만 그 때 왜 돌아왔는지는 조금 궁금한데 어차피 당신이라면 두고 갈 수 없어서 그랬겠죠.
그놈의 협이 뭐라고.
"고공?"
아이의 부름에 감고 있던 눈을 뜬 고공은 눈 앞의 아이를 보았다. 자신이 아는 이전 삶이랑 다른 외모지만 눈동자 색만은 같다. 물론 이전 삶과 현생을 동일하다고 볼 순 없겠지만 그래도 동일성이 있다는 것은 묘한 반가움을 선사한다고 생각했다.
"어, 혹시 자고 있었어요?"
"선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공중에 떠서 선잠……?"
"그럼, 제가 누워서 자겠습니까? 여행 잘 다녀오셨습니까?"
아이의 눈이 흔들린다. 몸에 남은 묘한 기척에 차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사고 쳤습니까?"
"사고 안 쳤어요. 제가 맨날 사고 치는 줄 알아요? 그런 거 아니고요, 사실은 친구들이랑 같 강원도에서 버려진 당산 나무를 찾았는데 애들이 그걸 손대서 그 뒤로 자꾸 악몽을 꾼다고 하는데 저는 멀쩡하거든요. 그래서 혹시 뭐 아는 거 있나 싶어서 말씀 드리려고 왔어요."
그런 거 만지면 동티나기 얼마나 쉬운데 그걸 손대나. 고공은 솔직히 아이가 위험한 것도 아닌데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라고 해도 안 듣겠지. 이전 삶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이는 친구를 도우려고 하겠지.
"당산나무가 버려졌다면 그 지역을 지키는 신이 떠나서 빈자리에 다른 게 들어와서 차지했거나 아님 지역이 버려져서 신이 회까닥한 경우겠죠."
"도와주세요."
"전 저승차사지 당신의 수호령이 아니라는 걸 제발 기억해주면 좋겠네요."
"도와주실거죠?"
협과 목숨을 저울질 했을 때 목숨을 택해주면 좋겠는데 절대로 안 그러겠지. 고공은 자신을 보면서 웃는 아이를 바라보며 기억도 안 지우고, 환생도 안 하고 차사 일 하는 자신의 업보라고 생각하며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게요."
"방법 좀 생각 좀 해볼게요. 그러니까 제발 무모하게 먼저 움직이마요. 그리고 친구들에게 이상한 거 만지지 말라고 해요."
"말려도 안 보이고 못 느끼면 안 듣더라구요. 혹시 화났어요?"
"당신한테 화난 적 없어요."
"산 속에서도요?"
고공은 아이를 보았다. 무슨 산이요? 되묻는 고공에게 아이가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며 살짝 시선을 회피하는 거 같다가 입을 열었다.
"저번에 꿈을 꿨어요. 산에 나 혼자 서 있는데 서서 고공이 왜 없는지 혹시 내가 하지말라고 한 거 화난 걸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깼어요. 그거 제 전생이죠?"
"그 때도 그리 화난 적 없어요. 화났으면 제가 지금 여기 있겠어요?"
눈치 보던 아이가 활짝 웃는다. 안도한 얼굴로 웃으며 아이가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하고 그 목소리를 들으며 그 웃는 얼굴에 결국 오늘도 졌다고 생각하면서 고공은 어떻게 할지 천천히 고민을 시작했다. 선계에 가서 월담 대협이라고 불러야하나. 아보와 인연을 매개로 하면 지상에 잠시라도 내려올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부디 무모한 짓 하지 마세요."
"알았어요, 걱정마요."
"인터넷에서 발견한 방법 쓰지 말고요."
"안 되겠죠?"
"안됩니다."
그러면 방법을 찾아 움직여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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