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이청현

설청-낯선 타인

notion5846 2025. 1. 10. 23:58

설은 지독한 피곤함에 커피를 마시며 분수대에 걸쳐 앉았다. 점심시간이 고작 1시간이라니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일들을 떠올리면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글바글거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오늘은 몇시에 퇴근할지를 짐작해 보고 남은 커피를 비우려는 설의 눈에 한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이 광장이 제법 유명한 관광지였지.

 

"저 티비에서 본 적 있어요!"

"정말인가요? 하하, 부끄럽네요. 활동 안 한지 좀 되었는데 말이죠."

"노래 진짜 잘 부르셨잖아요. 청현씨, 노래 진짜 좋아했거든요."

"오, 가수였나보네요."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관광객들의 대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온다. 청현이라고 불린 청년이 뺨을 긁적이면서 웃는 것이 보인다.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얼굴이 꽤나 평범해서 연예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설은 청현이라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던 청현은 누군가의 등 떠밀림에 머쓱한 얼굴로 손사례를 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목에서 나온 것은 노래였다. 작은 목소리로 시작된 노래는 점점 커져갔다.

 

"긴 잠이 든 그대 품으로 날 데려갈 줄 수 있다면 밤낮 하늘을 돌고 돌아도 나 그대만 볼 수 있다면~."

 

꽤나 발랄한 목소리가 광장에 울린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다니 직업은 직업인가. 설은 멍하니 노래를 들었다. 노래는 어느새 하이라이트로 이어졌는지 목소리 톤이 좀 더 올라간다.

 

"저 빛을 따라가 혜성이 되어 저 하늘을 날아 봐~."

 

흥이 겨운지 사내는 어느새 설이 앉아 있던 분수대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즐거워 보인다고 할까, 이제는 다른 사람들도 구경을 하고 있다. 원래 광장에서 소위 말하는 버스킹이 종종 있었기에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노래를 부르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청현의 검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흥에 겨운 사내가 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라? 하는 사이 설을 무심코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발을 맞춰서 춤을 춘다. 그 와중에도 노래가 이어진다.

 

"만약 그대가 힘이 들 때면 밤하늘을 올려다봐요. 나 언제나 그대 보는 곳, 그 곳으로 날아올라가고 싶어."

 

사내의 등 뒤로 새파한 겨울 하늘이 보인다. 노래가 끝낸 그가 자신이 붙잡고 있는 설의 손을 보고 놀라 황급히 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노래를 부르다보니 흥이 겨웠나봅니다."

"청현, 잘 부르네."

"계속 활동하지~."

"에이, 요새 신인 애들이 저보다 더 잘하죠."

 

어느새 다가온 다른 관광객들에게 둘러 쌓인 사내가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는다. 설과 다시 눈이 마주치자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떠난다. 새파란 하늘이 다시 보인다. 설은 자신이 지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독하게도, 지쳐있었다. 쌓이고 쌓이는 일, 일, 일. 물론 자신을 키워주신 양아버지의 일을 돕는 것이니 불평불만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 지쳐 있었다. 위로 받고 싶었다.

 

양아버지도, 의붓형도 좋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설은 어리광을 부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묵묵히 일해왔다. 그리고 이젠 지친거고. 그는 파란 하늘과 멀어지는 갈색 머리카락을 번갈아 보았다. 저런 여행객에게 위로를 받다니. 설은 종이컵을 근처 쓰레기통에 넣고 전화기를 꺼내서 검색창을 열었다.

 

청현이라는 이름을 검색하자 바로 인물 사전에 그 얼굴이 올라와 있었다. 갈색머리, 환하게 웃는 남자. 직업은 가수 겸 배우. 대충 훑어본 이력은 10대 중반 영화 조연으로 시작해서 음반도 내고, 뮤지컬도 나오고 활동 하다가 재작년 은퇴한 걸로 되어 있었다.

 

팬카페 같은 건 없고, SNS에 검색해도 최근 글이 없는 걸 보니 정말로 인기가 없었던걸까. 그가 한 말을 떠올렸다. 요새 신인들이 더 잘하죠, 하고 말한 건 어쩌면 대중적이지 못해서 은퇴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무심코 했다가 무례하다가는 걸 깨닫고 고개를 흔들었다. 설은 얼마전에 거절했던 휴가를 다시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물론 자신의 양아버지라면 당연히 주겠지만 말이다.


숙소로 돌아온 청현은 침대로 몸을 던졌다. 피곤하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다. 잠시 침대에서 뒤척이던 청현은 몸을 일으켜 노트북을 펼쳤다. 메일함을 열어보니 잘 쉬고 있냐는 매니져의 메일이 있어서 그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데뷔하고 17년이다. 아버지 친구라는 사람의 부탁으로 영화 조연으로 나갔다가 이어지는 온갖 출연 제의에 부모님 손에 이끌려 참가하고 그러다보니 쉴세 없이 활동했다. 그러면서도 나처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무대에서 조명을 받아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자신보다 더 특색 있는 이들이 늘어났다. 자신보다 어리고-물론 자신도 젊은 축이기는 하지만-매력 있고, 재능 있는 이들. 거기에 비하면 자신은 활동에 비해서 인지도도, 인기도 미묘했다. 그래서 지쳤다. 은퇴하고 싶다고 했더니 잠시 붙잡는가 싶더니 놔주었다. 뭐, 사장이 아버지 친구였으니까 계속 일감을 줬던거겠지.

 

그래서 그는 지금 먼 관광지에 여행을 왔다. 아무도 못 알아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용케도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서 엉겹결에 광장에서 노래까지 불렀다. 내일은 어떻게 돌아다니지. 다음에는 패키지 여행 말고 다른 걸로 할 걸 그랬어. 여행은 제법 재미있었다. 집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이대로 17년 동안 번 돈 전부를 여행에 쏟아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보니 아까 분수대에서 봤던 사람, 좀 당황했을려나. 하긴 갑자기 손 잡고 춤을 췄는데 당황하겠지. 으음, 제대로 사과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

 

"청현, 밥 안 먹?"

 

문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같은 여행객의 부름에 청현은 짧게 대답했다. 매니져는 언제쯤 자신이 은퇴했다는 걸 이해 해주려나. 답장을 쓰려던 것을 그만두고 일어났다. 이 호텔 식당은 제법 마음에 든다.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가기 위해서 엘리베이터에 타는 순간 청현은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휴가를 달라고 하다니 별 일이야."

"죄송합니다. 그래도 급한 일은 다 끝내고 가겠ㅅ-."

"어?"

"아?"

 

아까 손을 잡고 춤을 춘 백발의 청년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다. 꽁트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가르키면서 얼빠진 소리를 냈다.

 

"낮에는 그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그, 아까 노래 멋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괜찮았다니 다행이네요."

"식사 하러 가시나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합석해도 되나요?"

 

백발 청년 옆에 서 있던 일행으로 보이는 이가 뭐라 말하려는 듯이 입을 달싹이다가 마음대로 해라,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청현의 귀에 들렸다. 청현의 일행은 그러면 나중에 보자면서 먼저 가버렸다. 식당에 들어가 단 둘이 마주 앉아 있으니 뭔가 데이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까 다른 일행들이랑 이야기 하는 것이 들렸는데 가수셨다고 하시던데, 그래서 검색을 조금 했습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요. 노래도 들어봤는데 멋지시더라구요."

"아-."

 

청현은 백발 청년을 돌아보았다.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같이 춤추는 것도 좋았어요. 만난지 몇 시간만에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남은 여행 기간 같이 지내도 될까요?"

"네?"

 

청현은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역시 조금 그런가요?"

"확실히 갑작스러운 일이기는 한데 왜 저랑 다니고 싶어하시는 건가요?"

"당신 노래가 좋아서요. 오늘 처음 들었지만 그런 기분이 든 건 사실이니까요."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청년을 보며 청현은 곧 고민을 시작하였고, 설은 그의 대답을 조용히 기다렸다.

 

"은퇴를 했다지만 제 노래를 듣고 기뻐해주신다니 솔직히 좋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초면인 분이랑 같이 여행하는 건 조금 꺼려지네요."

"역시 그렇죠? 저라도 갑자기 초면에 이런 말 하면 당황스러울겁니다. 아까 그 노래, 사실대로 말하자면 위로 받은 기분이었거든요."

 

청현은 무심코 제 귀를 만지작거렸다. 실제로 활동할 때도 저런 말을 자주 듣거나 읽었지만 은퇴하고 나서는 처음 들어서 그런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면 저도 다른 관광객분들이랑 같이 다닐까요? 언제까지 머무시나요?"

"내일이요."

"내일 뵐게요, 청현."

 

사내의 웃음이 제법 환해서 청현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 날씨는 아직 쌀쌀하고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푸른색이었고 지독한 피로감에 짓눌린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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