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하다. 남궁단휘는 아직 쌓여 있는 일들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2년 전 사천에서 시작한 병은 이제 중원 전체를 집어 삼켰다. 사람을 괴물로 만들고, 죽은 시체가 움직인다. 끔찍하기 그지 없는 이 병에 황실도 문을 걸어 잠궜다. 많은 이들이 괴물을 피해 도망쳤고 남궁은 문을 열어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생존을 위해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만 했고, 그 와중에 단휘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런 괴물이 되어 움직이기 전에 제 손을 태워야만 했다.
지난 2년 동안 그는 끔찍한 피로에 함몰 되어 있었다. 이제 그 괴물도 많이 줄어 든 걸까. 가끔 개방의 거지들이 목숨을 걸고 다른 곳의 소식들을 전해주고는 했다. 보부상들도 조금씩이지만 다시 물건을 나르기 시작했다. 거기에 희망을 품어야 할까.
"나 왔어."
익숙한 월야의 목소리에 단휘는 가볍게 대답하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눈을 뜨고 문을 보았다. 문 넘어 그림자가 조심스레 무릎을 꿇는다. 무슨 사고쳤나? 그런 생각을 하며 개방이 보낸 소림쪽 소식이 담긴 서신을 읽어내려갔다.
"서쪽 산에 있는 건 일단 정리하고 태웠어. 같이 간 녀석들 다 무사해."
"다행이네. 너도 가서 좀 쉬어."
다시 본 월야의 그림자는 이제 엎어져 있었다.
"너 사고 쳤냐?"
"네가 나보고 맨 주먹으로 저놈들이랑 싸우면 위험하니 제발 견갑 좀 제대로 차고 나가라고 했잖아 그 말 들을 걸 그랬어."
엎드린 체 꼼짝을 하지 않는 그림자를 향해 일어섰다. 문을 열자 그제야 피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천인지 붕대인지 뭔가를 칭칭 감은 손이 보였다. 내 목을 베어, 하고 말하는 목소리는 장난치는 평소 그대로의 목소리였다. 현실감이 없다. 내가 물린 건 아무도 못 봤어, 하고 현실감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마 현실감이 없으니까 목을 베어 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 겠지. 목숨이 아까워지기 전에, 머리가 멋대로 생각을 이어간다. 단휘는 검을 들었다.
시야가 암전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아픈 건 여전히 느껴지네."
월야는 뒷통수에 느껴지는 아픔에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팔을 묶은 사슬을 보았다. 우리 가주님은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것을 하지 못했구나.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으려니 그제야 겁이 났다. 죽을 수 있다는 실감과 자신도 저 밖의 괴물들처럼 변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단휘는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을까. 아무한테도 말도 못하고 몇 명한테 입막음 시키고 고민하고 있겠지. 하지만 완전히 변하기 전에 죽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 오만한 표정이 일그러져 있을 걸 생각하니 죽는 것보다 더 괴롭다. 아마 이대로 이 안에 갇혀서 시간만 지나가고, 눈썰미 좋은 사람들은 눈치채고 수근거릴지도 모른다. 그래서는 안 된다. 여기에 우리 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짊어지고 있는 것이 그렇게 많은 녀석이 나 하나로 모든 걸 잃게 할 순 없는 일이다.
아직은 내가, 나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을 때 결정해야 한다. 택하기 힘들다면 택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도 보좌관의 일이겠지.어차피 너의 오만한 표정에서 시작된 인생이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그 표정을 보면서 죽게 해주면 좋겠다.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끝내 저 밖의 괴물들과 동급으로 봐라, 나의 소가주, 나의 형제, 나의 주군.
손목을 묶고 있던 사슬을 끊고 일부로 큰 소리를 내며 벽을 부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볼 수 있게. 도망칠 수 없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우리 잘난 가주님의 얼굴은 매우 침착하고 덤덤해 보였다. 의외로 빨리 결심을 했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칼등이 자신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네 생각을 내가 모를 거 같냐?"
처음 만난 날처럼 오만해 보이는 거 같은 그 표정에 월야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겠다 이건가. 이 얼마나 오만한가. 월야는 다시 한 번 통증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한철로 된 사슬을 가져와라."
벽에 처박힌 월야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단휘는 그리 명령하였다. 이대로 포기할리가. 개방이 보낸 소식 중에서도 감염되었지만 이성을 유지한 경우도 있다고 했다. 진행을 막아주는 약초도 있다고 했다. 이렇게 방법이 있는데, 기회가 있는데 포기할 거 같으냐. 또 다시 그렇게 가족의 시체를 태우게 만들 생각이라면 그만둬라. 설령 방법이 없다 라고 해도 나는-
"후우, 다른 사람들에게 말이 새어나가지 않게 주의해라. 단단히 구속해둬라."
지독한 피로감을 감추고 그는 오만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