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 끝에 그림자가 보였다. 슬쩍 돌아 본 그곳에는 장작을 쌓아두고 팔고 있는 청년이 보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환한 미소와 함께 청년. 아, 저거 사람이 아니구나, 주뢰는 제 눈으로 보이는 것에 검은 덩어리였다. 검은 연기가 뭉쳐져 있다고 해야 할까, 뒤집어 쓰고 있다고 할까, 그런 형태를 이루고 있는 걸 봐서는 원혼에 가까운 거 같은데, 쳐다보고 있으려니 시선을 알아차린 건지 청년이 주뢰를 향해 몸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것에 주뢰는 살짝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보아하니 원혼에서 태어난 요괴 같지만 나름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서 사는 거 같으니 자신이 관여할 필요 없겠지. 객잔으로 돌아와서 방을 받은 주뢰는 방문 앞에 소금을 뿌리고 창문 아래 부적을 붙였다. 이 마을은 딱히 위험한 것이 없어 보이니 이걸로 충분하겠지.
어머니의 어디에 가더라도 조심하라고 떠올리며 잠들었다. 그리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새벽에 깨어났다. 아마 축시 정도 되었겠지. 창문 밖에서 들리는 속삭이는 소리와 두들기는 소리. 문 앞의 소금을 확인하니 색이 조금 탁한 색으로 변해있다. 부적은 괜찮은 거 같으니 소금만 바꾸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멈추게 한 것은 뚝 멈춰버린 문 넘어 소리들이었다.
뭔가에 겁먹은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척들. 이것이 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영적인 것들은 짐승과도 같아서 자기보다 강한 존재가 나타나면 순식간에 흩어진다. 문 넘어 드리워진 그림자는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말을 걸어 왔다.
"당신이 파사의 눈을 가진 모용주뢰입니까?"
조용하고 스산한 목소리. 다시 본 소금이 검게 변해서 녹아내리고 있다. 잡귀들이 도망갈만했군.
"맞지만 이런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것은 사람에게 실례인 것을 알고 있습니까?"
"실례인 것은 알지만 늦은 시간이라 잠드신 줄 알고 기다릴 생각이었습니다. 깨웠다면 죄송합니다."
새 소금을 꺼내서 문밑에 깔면서 주뢰는 문 넘어 그림자를 보았다. 연기가 그림자에 비치는 것처럼 일렁이는 것이 낮에 시장에 보았던 청년이 떠올리게 만들었다.
"모용 대협, 제가 보이십니까?"
조용한 그 물음에 모용 주뢰의 푸른 눈이 문 넘어를 바라보았다.
여우나 뱀이 수련을 하면 하늘로 올라간다. 오래된 물건에는 혼이 깃들어 이매가 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지상에 오래 머물다 보면 삿된 것이 된다. 인간이 태어나면 인간, 동물이 태어나면 동물. 이렇게 대부분은 자신의 시작을 알고 있다. 꼭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옆에서 타인이 시작과 본질, 탄생을 보고 말해주고 깨닫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시작을 알지 못했다.
기억의 시작은 숲이었다. 인지를 시작하는 순간 자신은 이미 태어나서 숲에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숲에는 흔한 다른 인간의 혼령도 없었고, 이매도 없었다. 조용하고, 동식물만 있는 보통의 숲. 언제부터 자신이 여기 있었는지, 언제 태어났는지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그늘로 몸을 피하면서도 자신이 누군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을로 내려왔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 사람들 사이에 섞인 이매들도 자신이 뭔지 알지 못했다.
-도깨비 아냐?
-그런 거 치고는 너무 탁한 거 아냐?
-인간 냄새가 많이 나는데 너는 뭐야?
그들의 반응은 그랬다.
-자네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나?
-기척 좀 내고 다닐세.
-어제 만났다고? 글쎄, 그랬나?
인간들의 반응은 그랬다.
자신이 이도저도 아닌 것을 알았다. 사람들에게는 존재감이 흐릿하다. 이매망량에게는 인간의 냄새가 너무 강하다. 그럼, 자신은 무엇인가. 틈에 끼어 있는 그늘의 존재가 자신인 걸 알았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 푸른 빛은 희망으로 보였다.
<파사의 눈이래.>
<모든 걸 보는 눈.>
<먹으면 그야말로 극상의 맛.>
수근거리는 목소리가 귀를 사로 잡은 것과 동시에 푸른 눈을 보았다. 꾸벅,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그. 누구도 나를 먼저 알아 보지 못했는데 정말로 모든 걸 보는 눈이구나. 저 눈이라면 자신의 본질을 알 수 있을까.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있을까. 그리하여, 실례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문의 모용 주뢰를 만나러 나섰다. 침착하고 고요한 음색의 청년이었다.
대화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똑바로 봐주었다. 인간 냄새가 난다고 외면 받고, 인상이 흐릿하다고 기억되지 못하는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다. 누군가와 대면하는 것이 이리 기쁜 일일 줄 몰랐다. 약속한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즐거웠다.
"좋은 밤 보내셨나요?"
"네, 덕분에 편하게 보냈습니다."
약속대로 그는 자신을 만나러 와주었다. 태양 아래에서 보는 그의 푸른 눈은 밤에 보는 것보다 더 빛나 보였다.
"어제의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대협, 대협의 눈에는 제 본질이 보이십니까?"
조용한 눈이 자신을 바라본다. 천천히 입이 열린다.
"제 눈에 대협은 연기에 쌓인 청년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건 이런 답이 아니겠지요. 본질, 근원 그건 애석하게도 제 입으로 말하기 힘든 문제입니다."
탄식이 섞인 그 목소리. 원했던 대답이 아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러다가 그의 표정이 담담히 자신을 보는 것에 뻗던 손을 거두었다. 제 입으로 말하기 힘들다. 그건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천기 누설에 가깝다는 이야기인가.
"미안합니다, 원하는 대답이 아닐 테데 이런 대답 밖에 못 들려 드리네요. "
"아니요, 저를 봐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지 못한다고 해도 누군가는 당신이 태어난 걸 보거나 듣거나 할 수 있지 않나요?"
"저라는 자의식이 눈을 떴을 때 누구도 곁에 없었습니다. 좀 더 나이를 먹은 고상한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글쎄요, 전 이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어서 말이죠."
고공의 말을 듣던 주뢰는 문득 어머니를 떠올렸다. 하늘에 제를 지내는, 오랫동안 수련을 해 온 어머니라면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그녀에게도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괜한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그는 청년을 돌아보았다.
"혹시 괜찮다면 저랑 이 마을을 떠나서 여행을 떠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둘 수 없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누군가는 당신을 알지도 모르죠. 제 눈보다 더 위의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죠."
내밀어진 손을 보던 청년이 제 손을 잡는 것에 주뢰는 그제야 미소 지었다.
"고공입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모용 주뢰입니다."
잡은 손은 제법 시원하여 주뢰는 살짝 미소 지었다.
월녀궁은 옛날부터 달의 신을 모셔 온 곳이었고 마니는 그곳에서 가장 오래 산 신녀였다. 그녀의 하루는 일어나서 목욕 제계를 하고, 기도를 드리면서 시작한다.
손님이 온다.
오늘도 변함 없이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담담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가 그 손님이 크게 위해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손님이라. 마저 기도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마니가 사당을 나왔을 때 헐레벌떡 달려오는 시종이 보였다. 허둥지둥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말을 더듬어 가던 그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저 멀리 폭팔음이 사방을 흔들었다.
"신녀님, 요괴입니다, 요괴!"
시종의 다급한 말과 함께 뇌광이 번쩍인다. 아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가면서 동시에 동자신들을 웃음소리가 들린다. 손님이 온다고 하더니 요괴가 온 걸까. 하지만 신의 목소리는 위험을 예고하거나 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마니는 시종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 멀지 않은 곳, 월녀궁을 올라오는 길 이곳에서 일하는 퇴마사들이 보이고 그 앞에 선 자신의 아들이 보였다.
마치 서로 대치하고 있는 듯한 상황과 아들의 손에 서리기 시작하는 뇌기와 긴장하는 퇴마사들 사이로 마니는 몸을 날렸다. 그녀의 손에서 실을 반짝이는 순간 뇌기와 부적을 산산히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보렴."
자신이 아들이 이유 없이 이곳에 사는 이들을 공격했을리가 없다. 하지만 동시에 퇴마사들이 이유 없이 제 아들을 공격했을리도 없다. 둘 다 확실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신녀님 다름이 아니고 모용 대협의 옆에 삿된 것이 있어서 저희는 그것을 정리하려고 하였습니다."
"삿된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 말하며 뢰는 목소리를 높이고는 길 옆, 수풀을 바라보았다. 수풀은 무언가에 짓밟히고, 나무가 부러져 있었다.
"뢰, 네가 데려 온 이를 다른 이들이 보고 오해한 것이니?"
"고공도 퇴마사들을 보고 놀라서 과하게 반응해서 더 오해가 생겼을 겁니다."
"네 눈을 걸고 너와 함께 온 이가 삿된 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겠니?"
푸른 눈동자가 마니를 바라보았다. 네, 하고 대답하는 아들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마니는 퇴마사들과 시종을 물러나게 하였다. 그녀의 곁에 있던 신이 숲의 어느 지점을 가르쳐주고는 작게 웃는다. 그리 멀리 가지 못했구나. 퇴마사들에게 공격을 맞은 건지 바닥에 그대로 웅크리고 있다. 생긴 것은 보통 사람처럼 생겼다. 마니의 인기척에 고개를 든 그것은 배신감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요괴라고 하기에는- 마니의 옆에서 신이 그의 본질을 알려준다. 신의 말에 귀을 기울인 사이 그것이 마니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그 손톱이 마니에게 닿기도 전에 실이 그 몸을 감싸 땅으로 떨구었다.
"일단은 같이 가자구나."
실에 둘둘 쌓여서 온 그것을 발견하고 주뢰는 황급히 다가왔다.
"고공, 괜찮습니까?"
"저를 속였습니까? 저를 퇴치하시고 싶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고공은 자신이 누군지 알고 싶다고 하셨잖습니까? 다른 이라면 당신에게 그걸 말해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라 당신이 알면 무서워 할 거 같았고, 무엇보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로 당신을 실망 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주뢰의 이야기에 씩씩거리던 청년이 아직도 흔들리는 눈으로 주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니 대충 사정을 알았다. 주뢰와 이야기를 좀 더 나누는가 싶더니 씩씩거림이 줄어들고는 고개를 푹 숙인다. 실을 거두자 얌전히 일어나서 마니를 한 번 보고는 살짝 고개를 숙인다. 신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소리를 들으며 마니는 아들과 그 친우를 맞이하였다.
"물론 너의 본질이 뭔지 물론 보이지. 하지만 댓가 없이 함부로 천기를 누설하는 것도 힘들단다."
"그런, 가요."
아들의 눈에 저 청년은 어떻게 보이는 걸까. 하지만 확실한 건 신이 이리 조용하고, 손님이라고 칭한 이상 그는 살의도 느껴지지 않다. 요괴라고 해도 공존의 가능성은 있는 법이지. 제 남편을 떠올리며 마니는 시종을 불러 방을 준비하라고 시켰다.
"하지만 네가 댓가를 치룰 준비가 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구나."
마니의 대답에 두 청년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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