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고공&의진

창세기전 3장 1절

notion5846 2025. 1. 13. 23:52

처음 봤을 때부터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도 자신이 누군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에게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지 않았던 것은 우리가 만난 곳이 교회였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신의 앞에서 불필요한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당신도 그랬을까.

 

"오늘 이 마을에 이사 온 고공이라고 합니다. 교회에 가서 이사 드리라고 마을 어르신께서 말씀 하셨는데 맞게 온 건가요?"

"어서 와요, 저는 수습 사제인 주뢰라고 합니다. 담당 사제님은 저희 어머니십니다. 지금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어요. 수도에 갔다 오시는데 수도하고 멀다 보니 앞으로 몇 년 뒤에 돌아오실 겁니다."

 

당신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던 걸 기억합니다. 그 미소처럼 당신은 마을에 나름 잘 자리 잡았어요. 비록 자신에게 내미는 도움을 죄다 거절하고 혼자 지냈지만 그래도 사람처럼 지냈어요. 가끔 예배에 오면 당신은 멍하게 앉아 있다가 이윽고 눈이 마주치면 조소하는 건지 모를 미소를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잖아요. 어머니가 계셨더라도 당신을 크게 싫어하지 않았을 겁니다. 

 

"마을에서 지내면서 불편한 점은 없나요?"

 

제가 내미는 사과를 당신은 한참 보았죠. 마치 독이 있는 걸 대접 받은 사람처럼 말이에요.

 

"나쁘지 않습니다. 선을 긋고 나니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것도 좋고 그래요."

"왜 그리 타인을 싫어하십니까?"

 

그 때 나는 당신의 날개를 처음으로 봤습니다. 원래는 3쌍이었을 날개 중에 온전한 것은 1장 뿐이었다. 나머지 날개는 어떤 한 것은 흔적조차 없었으며 어떤 한 날개는 그나마 반만 남아 있었으며 어떤 것은 비틀려 있었다.

 

"천사도 같은 천사를 속이고 지상으로 떨구는데 그 천사보다 아래인 인간은 어떻게 믿겠습니까? 당신도 천사니까 같은 천사가 얼마나 광신도인지, 신의 눈에 들기 위해 뭐든 하는 거 알잖아요?"

 

고공, 나는 말이예요. 천사랑 인간의 혼혈로 한 번도 하늘 위를 본 적이 없어요. 어머니가 가끔 하늘로 돌아가실 때마다 그저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들로 상상을 해봤을 뿐이예요. 어머니도 물론 천사들이 완벽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온전히 하늘에 대해 말해주지 않은 것은 제 편견이나 잘못된 시선을 가지지 않길 바랬기 때문이겠죠.

 

그러니까 하늘에 대해 모르는 내가 당신에게 들은 하늘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가진 신앙심을 조금 흔들어 놨어요.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와 전혀 다른 이야기들. 당신은 내가 온전한 천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그 옛날 뱀이 선악과를 먹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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