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중심에 봉산이 있다. 기린이 태어나고, 선녀들이 사는 곳. 기린이 어느 정도 성장을 하면 사람들은 봉산에 오르는, 승산을 시작한다. 기린에게 왕으로 선택 받기 위하여. 요마들이 들끓는 황해를 건너서 목숨을 걸고, 오른다. 유진은 그런 것이 싫었다. 피를 싫어하는 자비를 가진 기린의 태생도 있겠지만 몇 십억 확률을 걸고 산을 오르는 이들의 어리석음도, 사라지는 목숨들도, 그리고 왕이 선택 되지 않아서 그 사이 나라에서 발생하는 그 많은 재해들로 죽어가는 백성들도. 아, 하늘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심하다. 그런 생각을 했다.
왕 같은 건 뽑고 싶지 않다. 하지만, 왕이 없으면 나라는 재해로 무너진다. 그는 앞선 승산에서도 왕을 찾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못 뽑으면 직접 왕을 찾으러 내려가야 할지도 모른다. 어느 나라 기린은 저 멀리, 일본에서 왕을 찾아왔다고 하던데 자신의 왕도 거기 있으면 어쩌나. 그는 멍하니 발 넘어 향을 올리는 이들을 천천히 바라본다.
아무 느낌도 없다. 왕의 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서 돌아보자. 유진은 자신을 따라오려는 선녀들을 따돌리고 싶은 걸 꾹 참고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중간 중간에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하러 오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왕이 아니었다.
포기할 쯤, 뒷머리채를 잡히는 감각이 느껴졌다. 고개가 돌아갔다. 이 느낌을 알고 있다. 전대 왕에게서도 느낀 익숙한 느낌. 머리를 숙이지 않는 기린의 머리를 숙이게 만드는 천기. 왕의 기운.
"당신은 바보입니까? 한쿄에게 물려서 팔을 날라갈 뻔 했는데 또 무모하게 밖에 나가서 사냥을 하려고 했다고요? 당신을 나를 의원으로 데려 온 겁니까, 아니면 장의사로 데려 온 겁니까?"
상대에게 붕대를 감으면서 버럭 소리를 검은 머리가 보였다. 녹색 장포로 몸을 감싼 그는 기린의 도착으로 웅성거리는 주변에는 시선을 주지 않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상대를 붙잡아 끝까지 붕대를 감고 있었다. 물론 유진을 향해 아주 잠시 고개를 돌렸지만 다시 시선을 눈앞의 환자에게 돌린다. 물론 그 환자가 손길을 뿌리치고 유진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자 한숨을 쉬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저는, 이번에 이곳에서 기린의 얼굴을 보게 되어서-."
"중일까지 무사하기를."
기린의 거절에 사내가 잔뜩 실망한 얼굴로 일어났다. 유진은 그를 지나 녹색의 장포를 입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대는 스스로가 왕인지 아닌지 확인하지 않을 건가?"
"왕 자리에는 관심 없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제가 왕 일리도 없잖습니까?"
"그러면 왜 승산한거지?"
"저쪽이 고용했으니까요. 걱정한만큼 요마를 많이 만나지 않고, 나름 순조롭게 올라와서 다친 사람이 없었지만요."
"날씨는 맑았나?"
"날씨도 계속 좋았죠."
유진은 작게 웃었다. 승산 중에 목숨을 잃는 자가 있을 정도로 승산은 어렵다. 하지만 왕이 될 자가 오르면 마수의 습격도 적고, 여행길은 순탄한다. 그 당연한 것을 인지하지 못 하는가.
"그러면 저는 다른 환자가 있는지 살펴 보러 가도 되겠습니까?"
"끝나면 하산 할 건가?"
"당연하죠. 제 약방으로 돌아가야죠."
"내가 못 돌아가게 하면 어떻게 할 거지?"
"기린한테 그런 권한도 있습니까?"
"없지. 하지만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선문답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왕이 되고 싶은 놈들이 이렇게 널렸는데 그 사람들은 죄다 거르고 왕이 될 생각은 하나도 없는 인간을 왕으로 택하다니 하늘은 참 웃긴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사내의 붉은 눈이 유진을 바라보았다. 제갈 려, 하고 다소 낯선 이름을 꺼냈다.
"너, 태과냐?"
"네, 뭐."
"돌아온지 얼마나 되었지?"
"이제 2년 정도 되었습니다."
태과. 이쪽에서 태어나야 할 존재가 식이라는 세계의 섞임으로 인하여 저쪽 세계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온 경우. 이곳에 없었으니 저번 승산 때 못 봤던거군. 저쪽까지 가서 찾지 않아도 다행인 건지, 아니면 결국 돌아와서 무겁기 그지 없는 왕좌에 올라가게 된 것을 안타까워 해야 할지 유진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기린은 자비의 짐승이다.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게 된 이 존재에 대해서 측은심이 생긴 거 아닐까. 유진은 제 안의 생긴 감정에 대해 그리 생각하며 맹약의 말을 삼키고 다른 말을 뱉았다.
"내일 또 너를 만나러 와도 되나?"
"딱히 상관 없습니다."
"방해는 안 할 테니 걱정 마라."
"괜찮, 은 겁니까? 그 왕을 찾지 않아도?"
"괜찮다."
"끄응, 뭐 일에 방해만 안 된다면 괜찮습니다."
기다란 침을 꺼내서 정리하던 그가 대답하고 유진은 자신을 기다리는 선녀들에게로 걸음을 돌렸다. 아직 여기 온지 2년이면 많은 걸 모르겠지. 서책들이라도 가져다 주면 좋아하려나? 하긴 싫어해도 앞으로 왕좌에 올라서 공부를 많이 해야 할 테니 싫어해도 쥐여 주는 수 밖에. 처서로 돌아가면서 그는 자신의 전대 왕을 떠올렸다. 좋은 왕은 아니었다. 어쩜 그리 탐욕스러웠는지, 어찌 하늘은 그런 자를 왕으로 택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마치 그 반대를 경험하라는 듯이 이번에 택한 이까지.
유진은 다시 고개를 돌려 환자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묘하게 뭔가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