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제갈 려

거미줄

notion5846 2025. 1. 13. 21:29

도망쳤다는 사파 놈들이 있다는 낡은 건물을 보며 유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곱게 한 번에 끝나면 좋았을 텐데 아무튼 번거롭게 만든다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곧바로 사방에서 검과 비수가 쏟아지지만 무엇 하나도 유진에게 닿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하면서 동시에 그 무기 주인들의 급소에 유진의 손을 떠난 비수들이 박혔다. 하나, 하나 쌓여가는 시체를 넘어서 혹시나 더 숨어 있는 녀석들이 없나 찾아보던 유진이 코에 익숙한 향이 맡아졌다. 피 냄새 사이 풍기는 이 냄새, 약 냄새다. 약초를 달인, 쓰디쓴 냄새. 냄새를 따라 문을 열자 그곳은 약방이었다. 약재가 들어 있을 서랍이 있고, 약을 달이는 화로 아직도 불을 지펴져 있어 약을 끓이고 있었고 그 한 가운데에 사내가 앉아 있었다.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하얀 옷을 입은 사내가 텅 빈 눈으로 유진을 돌아보았다.

 

"죽이려고 왔습니까?"

 

사내는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고는 유진의 등 넘어 시체가 널려 있는 복도를 보았다.

 

"네녀석도 사파놈인게냐?"

"사파놈들 치료하면서 살았으니 사파겠죠."

 

메마른 눈으로 유진을 돌아본 사내는 끓고 있는 탕약을 보면서 필요 없어졌구나,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유진의 귀에 들려왔다. 한탄하는 것 같이 중얼거리고는 그는 유진에게로 몸을 돌렸다.

 

"죽일 거면 고통 없이 죽이십시오."

"죽고 싶은 거냐?"

"살려도 얼마 안 되어 죽어서 오고, 병상에서도 칼부림하는 걸 보면서 살았더니 이제 더 보기도 싫네요."

 

길게 숨을 내쉬며 사내는 눈을 감았다. 의원인가? 사파놈들 치료하던 것이니 응당 사파로 볼 수 있겠지만 사내의 방금 그 말을 유진의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무인들과 독으로 가득한 당가에서 의술에 매진한 자신을 떠올렸다. 메마른 눈동자에 담긴 피곤함도 보였다. 유진은 다른 이들을 더 남아 있는지 한 번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탕약 냄새와 피 냄새가 섞여서 어지럽다.

 

유진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죽고 싶은가, 살고 싶은가. 사내는 눈을 뜨고 유진을 보았다. 그 눈에 아주 살짝 삶에 대한 미련이 보이는 것에 유진을 더 물어보지 않고 사내를 데리고 당가로 돌아왔다. 당가에서는 사파를 데려왔다고 잠시 떠들썩했지만 상대는 암의, 당유진으로 그가 한바탕 당가를 뒤집어 놓고 난 뒤에서야 사내는 당가에 정착하였다.

 

"려라고 했던가? 오늘부터 너는 당가 사람이다. 뭐 네 녀석이 할 일은 의약당 일밖에 없다. 다른 녀석들은 네놈이 위험해질지 모르니 안된다고 펄쩍 뛰던데 네 녀석은 의원이니 그런 건 배울 필요 없겠지."

"왜죠?"

"뭐가 말이냐?"

"왜 죽이지 않았습니까?"

"네 녀석은 의원이지 않으냐. 사람을 살리고 싶어 하는 의원."

 

유진의 말에 사내, 려는 약간 멍청한 표정으로 유진을 보다가 웃음을 흘렸다. 보호자인 할아버지가 사파를 대상으로 일하는 의원이기에 자신도 그렇게 성장했다. 그렇지만 언제나 늘 죽음이 코앞에 있었다. 살려도 얼마 안 되서 시체가 되어 돌아온다. 병상에서마저 서로를 죽이려고 든다. 자신이 의원이 아니라 장의사 된 기분이었다.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되자 아무도 자신을 의원이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똑같은 사파, 혹은 사파의 부하 아니면 장의사 소리도 들었던 거 같았다. 지쳐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나는 그저 사람을 살리고 싶었는데 그들이 사파인지도 몰랐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랬는데 아무도 살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약방에 왔을 때 비로써 끝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런데,

그 모든 걸 부수고 자신을 붙잡은 이가

자신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주었다.

그렇게 려의 세상이 변했다.

 

"제가 당신 뒤를 칠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네가? 나를 칠 수 있겠느냐?"

 

오만한 표정.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다. 당가 가주도 어쩌지 못하더니. 려는 너무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거 같았다. 그리하여 려는 얌전히 당씨 성을 받았다. 여전히 떠들썩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무공을 배우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어느 정도 조용해졌다.

 

유진은 제법 려에게 신경 써주었다. 애당초 자신이 데려왔으니 책임 지겠다는 생각으로 그랬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유진을 볼 때마다 뛰던 심장은 더 세차게 뛰었다. 그의 나이가 70살인 걸 알았을 때 잠시 고민을 했지만 여전히 심장은 뛰었다. 이것이 무슨 감정인지 정하는 것은 제법 어려웠다.

 

존경? 그렇지만 그를 만지고 싶다.

질투? 그렇지만 미움은 없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틀림없이 연모일 것이다.

 

웃기는 일 아닌가. 조부가 살아 계셨다면 그랑 비슷한 나이일 건데 연모라니. 웃기기도 해서 어차피 곧 사라질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내버려 두었다.

 

"제법 잘 배우는구나."

"암의가 가르쳐 주는 건데 잘 배워야죠."

"역시 네놈은 의원이 체질에 맞는 놈이었구나."

"새삼스럽지만 왜 저를 살려주셨습니까?"

"살리고 싶다고 말하는 놈이 그나마 갱생할 여지가 보였다, 이 녀석아."

 

마음 속에 끓는 감정들을 토해내면 편해지지 않을까. 그에게 거부당하면 진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불렀다. 그 옷자락을 붙잡고 마음을 고백했다.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그는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붉어진다. 빨개지지만 여전히 웃으면서 그는 입을 열었다.

 

" 그래, 거짓으로 너를 내치기에는 내 속도 썩어들어가겠구나. "

 

그 대답에 세상에 다시 한번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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