려는 문득 자신이 원래 살던 곳에서 입던 옷을 어디에 뒀는지 궁금해졌다. 분명 어디 챙겨 둔 거 같은데 싶어서 옷장을 뒤졌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 혹시나 해서 다른 이들에게 물어봤지만 알지 못하여 려는 자신의 수지침을 딸깍거리며 집 안을 돌아다녔다.
"그 이상한 옷? 시비들이 정리하다가 빨래한다고 들고 가던데 중요한 옷인가 봐?"
"뭐, 일단 고향의 옷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면 돌아 가버리지."
작게 중얼거리는 듯한 상대의 말. 그것은 익숙한 태도였다. 고향에 있었을 때 성인이 되고 나서 다시 만난 부모님과 처음 보는 동생. 그 동생이 보인 태도랑 유사해 보였다. 자신의 집에 타인이 들어온 것에 대한 적개심 혹은 거부감. 그것이 생각나서 제갈 려는 멀어지는 상대의 뒷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자신이 제갈이라는 성을 써서 더 그런 걸지도 모르지.
생각이라는 것은 의외로 한 번 시작되면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당 유진에게도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 못내 귀찮은 일인지도 모르지. 무럭무럭 자란 생각의 끝에 려는 얼마 거의 빈손으로 가문을 나왔다. 물론 편지를 썼다. 잠시 나갔다 옵니다, 라고 쓴 글.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자신이 도망쳤다는 걸 알겠지.
밖의 생활은 확실히 힘들었다. 인터넷도 없고, 휴대폰도 없는 세상은 꽤나 힘들었다. 길거리에서 자는 일도 있었지만 배가 아파서 뒹구는 아이를 구한 뒤로는 묵을 곳이 생겼다. 원래도 사람을 치료하던 일을 하던 것을 직업으로 삼았기에 그 뒤로부터는 그럭저럭 지낼만 했다.
당신이 상냥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나라는 존재가 부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한 번도 제갈의 성씨를 쓴 적 없었으니까 이대로 죽어도 당신은 모르겠지. 그거면 된 거다. 그거면.
'그래도 이상한 말 하나 들었다고 가출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애들 같은 짓이었어.'
어쩔 수 없지. 생각이란 것은 호르몬의 결과 아닌가. 마치 흐르는 폭포와도 같은 거니까. 배에 칼이 박힌 체 려는 그런 생각들을 이어갔다. 설마 자기가 벤 사람을 치료했다고 화내면서 칼 들고 찌르는 사람도 있구나. 하긴 저쪽이나 이쪽이나 재수 없으면 칼 맞아 죽는 건 똑같네.
'여기서 죽으면, 어느쪽 지옥에 가는 거지?'
의외로 아픔이 없어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려!"
익숙한 목소리. 저승사자는 친숙한 얼굴로 온다고 하더니, 같은 착각이 들었다. 허둥지둥거리면서도 자신을 치료하는 손길과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 아, 역시 당신은 자상하다.
"괜찮을거다, 견디거라."
그 때, 아마 출혈과 식어가는 체온으로 아드레날린이 넘쳐 흐르고 있었을까. 평소보다 당신이 더 빛나 보였던 것은. 아아, 누가 그랬더라. 사랑이란 감정은 결국 화학 작용에 불과하지만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 하는가는 우리의 의지라고. 그 때 넘쳐 흐른 아드레날린이 내 머릿속에서 화학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당신이 이리 보이게 된 것은 내가 그 화학 작용에 멋대로 의미를 부여해버린 탓이겠지.
"밤이 늦었는데 아직 깨어있구나."
"전에 구해주신 서책의 내용이 궁금해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내일 의약당 출근도 못 하겠다. 어서 자거라."
슬쩍 자신의 옆자리에 눕는 그를 보며 려는 서책을 덮었다. 당신 앞에서는 내가 얼마나 어려지는지! 촛불을 끄고 누우며 어둠속에 있을 당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당황하는 거 같은 목소리가 들렸지만 피하지 않는다. 어둠 속에 있을 당신의 표정 하나, 하나를 전부 상상할 수 있다.
이 감정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사랑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새삼스럽지만 연모 합니다, 유진."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당신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다. 나지막한 대답을 들으며 려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