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94

아보와 고공-유년시절

"오랜만이네요!" 사람들 사이 그 분홍색을 발견한 아보가 인사를 건내자 그는 살짜 미간을 찌푸리다가 곧 웃으며 그렇네요, 하고 대답해왔다. 이제는 그가 묘하게 거리를 두는 성질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아보는 섭섭을 느끼기 보다는 반갑게 인사하며 고공의 앞에 섰다. "여긴 어쩐 일인가요?""아, 이 근처에 산동악가가 있던가요? 별 일이 뭐 있겠습니까? 배달입니다." 그리 말하면서 자신이 짊어진 나무함을 가르킨다. 꼭 관짝 같다는 생각이 드는 길쭉한 함 안에는 시체 대신 배달 품목들이 가득 들어 있겠지. 바빠 보이지도 않고, 걸음도 느긋해 보이고, 마을에 들린 걸 보며 배달이 끝난 걸까? "식사라도 하시고 가시겠어요?""아뇨." 거절 당할 것을 짐작했지만 저렇게 즉답으로 대답할 줄이야. 이만, 하고 등을 돌려..

1차/고공&의진 2025.01.09

크리스마스

지구의 기념일이라는 개념을 헤일로는 아직 생소하게 느꼈다. 있는 건 안다. 하지만 왜 그걸 굳이 지정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면 자신들의 인생이 달라지기라도 하나? 헤일로에게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도 크리스마스에 애인이랑 놀고 싶어!!" "그날이 아니더라도 애인이 있으면 데이트를 할 수 있잖아요?" "넌 가끔 되게 이상한 말을 한다? 그거야 당연히 기념적인 날에 기념적인 일을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게 좋지!!" 열변을 토하는 히어로를 보면서 헤일로는 그게 그리 중요한가 싶어졌다. 크리스마스 지구에 산 어떤 인간 때문에 생긴 날이라고 하는데 그거랑 애인이랑 무슨 관계인지 이해는 안 가지만 그런 걸 원하는 게 보통의 지구 생명체라면 자신의 사랑인 미테..

1차/헤일로 2025.01.09

시아온유

꿈을 꾸었는데 그 꿈 속에서 나는 산더미 같은 짐들을 보고 있었어. 내 키보다 높이 쌓인 그 물건들은 하나 같이 과거에 내가 쓰던 물건이거나, 가족들이 쓰던 물건들이었어. 그 더미들을 뒤지면서 나는 기억들을 더듬어 가고 있었어. 물건들 하나, 하나 어디에서 썼던 물건인지, 언제 쓴 물건이 전부 생각이 나더라. 동생이 졸업식에서 쓴 꽃다발, 아버지의 넥타이, 어머니가 자주 입던 바지, 우리집 벽에 걸린 꽃병 그림, 내가 만든 적 있는 점토 그릇 같은 나도 잊고 있던 기억들 사이에서 한참 물건들을 뒤지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어.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거 같더라. 동생이었어. 동생이 등 뒤에서 물었지. "뭘 찾고 있는거야?" 하고 묻는데 나는 한참 아무 말 못 했어. 스스로도 뭘 찾는지 기억이 안 나서 ..

1차/시아 2025.01.09

첫만남 이야기

"두 분은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의뢰도 없고 한가해진 오후, 간식을 먹으며 각자 시간을 보내던 도중 토키가 질문을 던졌다. 의자에 몸을 파묻고 부적들을 확인하던 천룡도, 자신의 검에 식을 새기고 있던 고요도 움직임을 멈추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학교에서." 하고 고요가 먼저 대답하고는 다시 식을 새기는 일을 시작하자 이번에는 토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두 분은 처음부터 친하셨어요?" 둘 다 잠시 대답이 없다. 까마득한 과거를 보는 것처럼 잠시 허공을 보다가 먼저 입을 연 것은 고요였다. "글쎄, 그랬나?""그랬나는 무슨~. 하나도 기억 안 나?""뭐를?""토키군, 저거 봐. 하나도 기억 못 하는 저 얼굴~." 일어난 천룡이 토키의 곁으로 가 그 어깨에 팔을 두르며 능청스레 입을 열었다..

1차/퇴마사즈 2025.01.09

고공-문두(저승사자 AU

“-대협.”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더 자고 싶어서 무시했더니 목소리는 더 가까운 곳에서, 더 크게 들렸다. 자신을 흔드는 손길이 느껴진다. “일어나세요, 문두 대협. 언제까지 길거리에서 자고 있을겁니까, 문두 대협. 당장 일어나세요.” 묘하게 서늘한 그 부름에 일어나니 그곳은 산길이었다. 안개까지 낀 숲길에서 자고 있었다고? 언제 잠든거람. “일어나셨네요.”“고씨, 여기서 뭐해?”“길에 잠든 대협 깨웠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공은 자신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여전히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다. 검은 장포를 어깨에 걸치고 있기는 하지만 외모는 변하지 않았군. 안개 속으로 먼저 걷기 시작한 고공의 뒤를 따라서 문두도 걷기 시작했다. “고씨, 술 있어?”“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술을 찾네요...

1차/고공&의진 2025.01.07

산책

간단한 의뢰 하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천룡은 마찬가지로 집으로 돌아가던 토키를 만나 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학교에 들려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는 토키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걸어가며 사무실에 별 일 없으려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여우의 손이 토키와 천룡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겨 걸음을 세우게 하였다. “뭐 하는 거야?!”“뭐, 뭐, 화났어요?”-저거 뭐냐? 여우가 가르킨 것은 흔한 인형 뽑기였다. 여길 한 두번 다녀 본 것도 아닌데 갑자기? 여우는 아무렇지 않게 기기 안에 있는 인형을 가르키며 뽑아주지 않으면 난동을 피우겠다는 말에 천룡이 부적을 던지려는 것을 토키가 말리고 기기 앞으로 다가갔다. 작은 열쇠고리인데 이런게 가지고 싶다고? “토키, 이런거 받아주면 버릇 나빠져.”“괜찮아요, 이..

1차/퇴마사즈 2025.01.07

고천-전생

익숙하고 지겨운 천장, 그리고 익숙한 손길. 고개를 돌리니 늘 똑같은 무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그가 있었다. 바늘의 따금함을 느끼면서 천장을 보고 있으려니 자신을 기절 시킨 그 머리통이 공중에 떠서 자신을 보고 있다. 그 옆으로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지나간다. 어디선가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 중 하나, 남들은 보지 못하는 자신만의 지옥. “밤에 잠을 못 주무시는 거 같던데 안정제를 처방해드릴까요?” 자신의 주치의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에게 이 지옥을 말한 적도 있지만 그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자신이 일반 평민이었다면, 아버지가 재혼해서 다른 자식이 있었더라면 자신은 진작에 정신병원에 들어갔을테지. 하지만 헛것이 아니다. 자신의 정신이 병든 것도 아니다. 아주 어릴적부..

1차/퇴마사즈 2025.01.07

주공-사후

눈을 뜨니 나룻배 위에 자신이 있었다. 사공과 자신만 단 둘이 타고 있는 나룻배는 어둠을 가르고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푸르스름한 달이 검은 수면과 배를 비추고 있는 장소. 딱히 물어보거나 할 필요 없이 모용주뢰는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내일 아침 자신을 깨우러 올 시종의 놀란 표정을 상상하고 말았다. 자신이 나이를 많이 먹기는 했지. 노환으로 죽은 건 호상이려나. “생각보다 겁을 먹지 않으시군요.” 사공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살만큼 살았으니까요." 매끈해진 자신의 손을 보면서 주뢰는 대답하였다. 사공이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노를 젓는다. 자신이 죽었고 이곳이 삼도천이라면 눈앞의 사공은 사자인걸까? “큰 미련은 없나봅니다.” “저는 나름 최선을 다해서..

1차/고공&의진 2025.01.07

옛날 이야기

노크 소리에 문을 열자 힘차게 인사 해오는 낯선 이의 팔에 둘러진 완장에 새겨진 익숙한 그 길드의 문양에 천룡은 반사적으로 문을 닫으려고 했으나 토키의 손님이신가요? 물음에 겨우 참고 그는 안으로 손님을 들였다. 선물용 음료수 박스를 내려놓은 그는 넉살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토키가 내민 믹스 커피를 받았다. “고요와 같은 길드에서 근무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다른 지역 출장 간 사이 그녀석 길드 그만 두고 프리랜서가 되었다는 이야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녀석은 묘하게 이별에 있어서는 타이밍이 안 좋군, 천룡은 십년 전 일이 생각나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근데 이 길드원은 나를 모르는 걸까? 그러면 고요보다는 후배이려나? 아마 자신은 모르는 고요를 알고 있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속이 살짝 쓰..

1차/퇴마사즈 2025.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