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94

페트산-환생

아이가 태어난 마을의 뒷산에는 가면 안 되는 호수가 있었다. 언제나, 1년 365일 얼어붙어 있는 호수. 자연스럽지 않는 이 호수는 아주 오래전에 누군가가 자신의 모든 걸 다 받쳐서 얼어붙게 만들었다는 호수는 어른들에게 가까이 가면 안 되는 이상한 곳이었고, 아이들에게는 어른들 몰래 한 번은 가보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아이도 친구들이랑 같이 호수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쨍쨍 비치는 여름의 태양과 안 맞게 반짝이는 호수는 신기하고 시원했지만 그게 전부인 곳이었다. 곧 친구들처럼 그곳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고 다른 곳으로 놀러 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일 년이 지나고 아이는 청년이 되었다.  마을이 작게 느껴진 그는 곧 마을 떠나 도시로 먼 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고향에 가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지내..

1차/페트라 2025.01.11

좀비 아포au

사람은 감정 이입을 잘하는 동물이라고 한 것이 생각났다. 누가 했던 말이더라? 주사기에 가득 찬 약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벽 넘어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고통스러워 하는 것만 같았다. 실상은 아무 의미 없는 괴물의 소리이겠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이번에 만든 치료제는 효과가 있을까? 약효가 조금이라도 있기를, 저 고통이 끝나기를. 한참을 기다리지만 신음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방문에 달린 유리창으로 본 안 쪽은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그래도 전보다 식욕이 줄어 든 거 같았는데 이것도 아닌가. 다른 배합을 생각해야겠고, 또 의진이의 피를 뽑아야겠지. 생각만 했는데 밀려오는 피곤함에 결국 긴 한숨을 내쉰다.  결국 다음 실험으로 넘어가기 전에 실험실을 나왔다. 텅 빈 도..

1차/고공&의진 2025.01.11

#앤캐가_살겠다고_널_팔았대_소리들은_자캐

평소처럼 집무실의 문을 열었더니 평소처럼 가면이 느긋하게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뒷골이 살짝 당기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헤르는 가면을 불렀다. 고개를 돌린 가면은 찢어진 상사의 옷과 피인지 진흙인지 모를 것으로 엉망이 된 그의 머리를 보면서 의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너-." 헤르의 물음에 가면은 평소처럼 네, 하고 대답하며 그의 책상 위에 커피를 올려두었다. "너 전에 너 스스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 했지?""그런 이야기를 했던 가요? 지금 폰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그 말은 잊어요." 가면은 의자에 앉은 헤르가 제 깃털을 정리하는 것을 보며 대답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는 가면에게 헤르는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내가 없어져서 자유로워진다면 나를 팔..

1차/가면 2025.01.11

좀비 아포 au

피곤하다. 남궁단휘는 아직 쌓여 있는 일들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2년 전 사천에서 시작한 병은 이제 중원 전체를 집어 삼켰다. 사람을 괴물로 만들고, 죽은 시체가 움직인다. 끔찍하기 그지 없는 이 병에 황실도 문을 걸어 잠궜다. 많은 이들이 괴물을 피해 도망쳤고 남궁은 문을 열어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생존을 위해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만 했고, 그 와중에 단휘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런 괴물이 되어 움직이기 전에 제 손을 태워야만 했다. 지난 2년 동안 그는 끔찍한 피로에 함몰 되어 있었다. 이제 그 괴물도 많이 줄어 든 걸까. 가끔 개방의 거지들이 목숨을 걸고 다른 곳의 소식들을 전해주고는 했다. 보부상들도 조금씩이지만 다시 물건을 나르기 시작했다. 거기에 희망을 품어야 할까. "나 왔어." 익숙한 월..

1차/남궁월야 2025.01.11

첫눈

춥다, 춥다 싶더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훈련도 못하겠네, 하고 월야는 생각하며 정원에 쌓이는 눈을 보았다. 그러보니 어릴 적에는 눈이 쌓이면 쉬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그것도 못하는군. 훈련이야 쉰다고 해도 쌓인 서류와 업무는 쉴 수 없으니까 말이다. "뭐해?" 앞장 서서 걸어가던 단휘가 자신을 부르는 것에 월야는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기를 단위의 두루마기 위에 올려놓고 정원으로 내려갔다. 등 뒤에서 자신을 보는 단휘의 시선에도 월야는 정원까지 내려가 이제 수풀 위에 쌓이기 시작한 눈들을 제 손 위에 모아서 뭉치기 시작했다. "그거 나한테 던지지마라." 역시 소가주님 머리도 좋으셔라. 월야는 태평스레 대답하고는 뭉친 눈덩이를 들고 와서 돌아서서 단휘를 목표로 눈덩이를 던졌다. 물론 그리 힘을 넣..

1차/남궁월야 2025.01.11

귀향

"이야, 오랜만이네요. 아니다,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이죠." 쾌할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헤르난즈는 손에 들린 캔커피를 마저 비워냈다. 이곳은  몇 년 전 왔을 때랑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바닷가를 왔다 갔다 하는 부지런히 움직한 어부들과 상인들, 그 넘어로 보이는 돌로 이루어진 흙길과 비슷비슷하게 생긴 집들. 지겹도록 들은 갈매기 우는 소리가 울리는, 폰 델리안의 고향이다. 헤르난즈도 이곳에 온 적 있다. 명절에 고향에 안 가고 본부에 있을거라는 자신을 끌고 폰이 이곳에 들린 적이 있었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시골의 풍경을 배경으로 가면은 척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분명 처음 왔을텐데, 이전에 폰이 그랬던 것처럼 앞장 서서 걸어가는 것이 불쾌하다. 불쾌하면서도 그리움에 헤르난즈는 길게 ..

1차/가면 2025.01.11

냉전

"두 분 싸우셨어요?" 린의 말에 단휘가 그를 한 번 보고는 다시 시선을 눈앞의 두루마기들로 돌렸다. 린은 그 옆 비워진 보좌관의 자리를 보았다. 단휘의 보좌관, 월야가 자리를 비운 지 꽤 되었다. 일단 이유는 최근 마교의 흔적이 곳곳이 발견되어 마기를 감지할 수 있는 그가 그 흔적들을 조사하고 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평소라면 다시 나가는 일이 있어도 옆에서 일을 돕던 월야가 이번에는 돌아와도 인사조차 없이 제 방에 있다가 다시 나가버리니 싸웠나?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아마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 "으음, 정말로 아무 일 없죠?""그래." 그러보니 언제부터 서로 얼굴을 안 보게 된 거지?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약 3개월 전 산적 소탕을..

1차/남궁월야 2025.01.11

첫만남

P시리즈들은 대게 가동한 뒤 10년 전후로 은퇴한다. 메모리는 분해 되고, 몸체 파츠는 재활용 된다. 그에 반해 8245-P-27은 40년 동안 가동 되었다. 이유는 그가 머문 교구의 성직자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한 덕분이었다. 늙은 성직자는 기기인 그에게도 동정심을 베풀었다. 그렇게 가동 한지 15년 째, 프로그램 사이로 작은 오류가 생겼다. 신도들에게 대답하는 반응 속도가 0.6초 정도 느려졌다. 계산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가끔 이 좁은 고해실을 나가고 싶어졌다. 원래라면 해서는 안 되는 영역. 이건 오류다. 명백한 오류. 보고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때 고해성사를 하던 이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너무 오래 일해서 지친 거 같아요. 전부 다 그만 두고 싶어요. 얼굴조차 모르는 신도의 말에 자신의 ..

1차/리베 2025.01.11

귀향

오랜만의 숲이다! 다투라는 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곧바로 여왕에게로 달려갔다. 땅에 발을 묻고 뻗어오는 가지를 얼굴에 대고 이야기를 나눈다. 밖에서 먹을 것들의 에너지를 넘겨주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언어가 아닌, 신호로 주고 받는 식물의 대화. 여왕 아래 자리 잡은 다투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레가 울고, 산짐승들이 내는 바스락 소리가 울린다. 여기가 숲이다. 다투라 족의 씨앗이 숲에 자리를 잡고 발아한다. 여왕을 중심으로 숲에 터를 잡고 성장한다. 성장한 여왕에게서 동족이 태어나고 숲에서 살아간다. 가끔, 거대한 여왕을 보고 신목이니, 뭐니 하고 제사를 지내면서 스스로 받쳐지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젠 없나 보다. 요샌 먹이 구하는 것도 힘들다. 밖에서 오는 이들이 없다. 결국 나가서 데려와야 하는데 ..

1차/다투라 2025.01.11

주공

버려진 집을 발견한 주뢰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여행하는 입장에서 밤이슬을 피할 수 있는 벽과 지붕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주인이 있거나, 선객이 있을 가능성도 있기에 조심스레 안을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작은 솥을 꺼낸 주뢰를 문짝이 사라진 부엌으로 들어가 아궁이를 살펴 보고, 근처 나뭇가지와 낙엽을 긁어 모아 불을 지폈다. "물이라도 길러 올까요?""뒷마당에 우물이 있던데 아직 물이 있는지 확인해 보는 건 어때요?" 짐을 내려놓은 고공은 주뢰를 잠시 말 없이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총총 사라졌다. 마침 오는 길에 잡은 토끼도 있고 건조쌀도 있으니 나름 든든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조리 준비를 끝낸 주뢰는 고공이 돌아오지 않은 것에 의문을 느끼며 뒷마당으로 나가..

1차/고공&의진 2025.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