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94

저승사자 고공과 영안 아보

겉에 입은 검은색 두루마기를 보아하니 자신의 집 베란다로 들어온 저 혼령은 저승사자구나. 뭐라더라 한국 지부 유니폼이라고 했던가. 고공이 언젠가 해준 설명을 떠올리면서 아보는 부모님의 말에 대답하면서 베란다에 들어와서 저를 향해서 가볍게 손을 흔든 낯선 저승사자가 베란다 바닥에 축 늘어진 고공을 내려놓는 것을 보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다친 건가? 하지만 데리고 온 저승사자가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웃고 있는 걸 보면 큰 일이 아닌 거 같아서 아보는 부모님과의 대화에 집중했고 잠시 머뭇거리며 생각하던 낯선 저승사자는 아보의 곁에 와서 웃음을 참는 소리를 내며 슬쩍 속삭였다. "당신이 저 녀석이 말한 그 귀여운 친구 맞죠? 회식이 있어서 저 녀석한테 술 먹여서 지금 좀 취해 있어요. 이상한 주정은 안 부릴..

1차/고공&의진 2024.11.23

주공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살피던 주뢰의 눈에 다른 나무들 보다 몇 백살은 더 산 거 같은 거대한 나무가 보여 그 밑에서 신세를 지기로 결정하고 다가가자 거기에는 친우가 있었다. 땅 위로 드러나 있는 뿌리 틈에 몸을 파묻고 숨을 헐떡이는 친우의 모습에 그는 황급히 다가갔다. 가슴팍에 난 베인 부상을 혼자 지혈하다가 혼절했는지 피가 흐르는 모습에 주뢰는 자신이 가진 면포와 금창약을 꺼내 상처를 치료하고 주위를 살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복면인 한무리의 시체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전투를 벌이다가 도망친건가? 주위에 더 기척이 없는 걸 보니 잔당은 없는 거 같고, 상처가 덧날지도 모르니 좀 더 지켜보기로 하였다.열이 끓던 몸은 다행스럽게도 지혈이 되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안..

1차/고공&의진 2024.11.22

한미

"놀이공원 좋아해요?" 퇴근하고 돌아온 미료의 말에 모니터에서 눈을 뗀 한결이 한 박자 느리게 어? 하는 소리를 내다가 입에 물고 있던 커피캔을 내려놓았다. "좋아하지." "의외네요." "놀이기구 중에 롤러 코스터 같은 건 스릴 있잖아." "한결씨가 말하는 스릴의 기준은 뭐예요?" "그냥 내가 즐거우면 그만인거지." "그리고 거기에 도덕적 가책을 못 느끼는 편이고요?" "사회적 지탄을 받을 건 아니까 안 하지. 그리고 나 그렇게 양심 없는 범죄자는 아니야. 일단 나는 즐거움을 위해서 약간의 도덕성을 신경 안 쓰지만 살인이나 사기 같은 범죄에 즐거움을 느끼는 건 아니라고." "아아, 알았어요. 아무튼 그래서 놀이공원을 좋아한다는 이야기죠?" "좋아해." "단골 손님이 주셨어요." 라는 말과 함께 미료가 지..

1차/서한결 2024.11.21

미리 챙기는 크리스마스

지구의 기념일이라는 개념을 헤일로는 아직 생소하게 느꼈다. 있는 건 안다. 하지만 왜 그걸 굳이 지정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면 자신들의 인생이 달라지기라도 하나? 헤일로에게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나도 크리스마스에 애인이랑 놀고 싶어!!""그날이 아니더라도 애인이 있으면 데이트를 할 수 있잖아요?""넌 가끔 되게 이상한 말을 한다? 그거야 당연히 기념적인 날에 기념적인 일을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게 좋지!!"열변을 토하는 히어로를 보면서 헤일로는 그게 그리 중요한가 싶어졌다.크리스마스지구에 산 어떤 인간 때문에 생긴 날이라고 하는데 그거랑 애인이랑 무슨 관계인지 이해는 안 가지만 그런 걸 원하는 게 보통의 지구 생명체라면 자신의 사랑인 미테도 그걸 원..

1차/헤일로 2024.11.20

저승사자 고공이랑 영안 아보

심심하다. 시골에 내려가는 차 안은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거 아닐까. 같은 생각을 하면서 아보는 뒷자석에 몸을 푹 파묻으며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아 있는 부모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게임도 질렸고, 책 읽기는 차 안에서는 하면 멀미나서 힘들단 말이지. 결국 아보는 핸드폰을 꺼내서 메모장을 켜서 거기에 문장을 썼다. [심심하니까 뭐라도 이야기 해주세요.]"할 이야기 없는데요." 제 옆에 있던 고공이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입으로 대화하고 싶어도 허공에 대고 이야기 하면 부모님이 또 심각해지시겠지. [아무거나 해봐요. 연애 이야기 같은 거 없어요?]"연애요? 그런 거 좋아해요?"[해본 적 있어요?] 어이 없다는 듯이 고공이 팔짱을 끼고 목소리를 확 높여서 네? 하고 되묻는다. 그리고는 가볍게 고개..

1차/고공&의진 2024.11.19

허산X페트라

아, 젠장. 페트라는 얼굴을 구기며 자신의 날개와 꼬리를 보았다. 어째 오늘 컨디션이 안 좋다더니 폴리모드가 어정쩡하게 풀렸군. 폴리모드 다시 걸면 또 속 뒤집어지는데, 같은 생각을 하면서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았다. 뿔과 검은 비늘의 꼬리와 날개가 꼴사납게 느껴진다. 쓸데없는 자괴감이라는 거 알지만 이렇게 보고 있으니 다른 드래곤들에 비하면 팔푼이라는 것이 느껴져서 짜증이 난다. 그 짜증으로 거울을 부수기 전에 그는 밖으로 나왔다. 산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하면서 그는 처음 허산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사실 첫인상은 잊었다. 그냥 그때에는 어디든 가고 싶다고 생각했으니 허산 녀석이 사실은 저승사자라고 해도 괜찮았을 것이다. 저승사자 허 산이라. 안 어울리는군. 널찍한 평원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크게 들..

1차/페트라 2024.11.18

고천

"두 분은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의뢰도 없고 한가해진 오후, 간식을 먹으며 각자 시간을 보내던 도중 토키가 질문을 던졌다. 의자에 몸을 파묻고 부적들을 확인하던 천룡도, 자신의 검에 식을 새기고 있던 고요도 움직임을 멈추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학교에서." 하고 고요가 먼저 대답하고는 다시 식을 새기는 일을 시작하자 이번에는 토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두 분은 처음부터 친하셨어요?" 둘 다 잠시 대답이 없다. 까마득한 과거를 보는 것처럼 잠시 허공을 보다가 먼저 입을 연 것은 고요였다. "글쎄, 그랬나?" "그랬나는 무슨~. 하나도 기억 안 나?" "뭐를?" "토키군, 저거 봐. 하나도 기억 못 하는 저 얼굴~." 일어난 천룡이 토키의 곁으로 가 그 어깨에 팔을 두르며 능청스레 입을 ..

1차/퇴마사즈 2024.11.17

퇴마사즈

아프다. 고요는 눈을 뜨자 느껴지는 목의 칼칼함과 띵한 머리에 잠시 멍하게 있다가 곧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잠든 천룡이를 품에서 내려놓고 눕힌 다음 방을 나와서 마스크를 찾아 쓰고 체온계로 자신의 열을 확인하였다. 약간의 열이 있군. 천룡이한테 옮은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감기약을 찾아 보지만 안 보인다. "뭐 찾으세요?""혹시 감기약 봤어?""감기신가봐요. 어쩌죠, 저도 없는데 가서 사올까요?" 혼자 지낼 때에는 감기가 걸렸던, 열이 나던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누군가와 같이 사는 이상은 조심해야겠지. 아직도 전염병이 돌기도 하니까. 지갑을 꺼낸 고요가 돈을 건내주기도 전에 이미 외투를 걸친 토키가 나간 뒤었다. 맙소사, 나보다 어린애한테 돈도 안 주고. 나중에 계좌이체 해줘야지. "고요..

1차/퇴마사즈 2024.11.15

전투

던전 들어오기 전에 저주 내성 장비를 착용하라는 자기 말은 대체 어디로 들은 건지 모르겠다고 미료는 생각했다. 묻어버린 왕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이 던전 안에서 환각과 정신 오염 함정이 그렇게 많은데 대체 뭘 믿고 안 챙기는 건지, 원. "한결씨." 불러보지만 없다. 멍하게 눈앞에 석상과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고개를 천천히 돌린다. 텅 빈 눈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걸 보는 눈. 저 석상의 특징이 사람을 유혹하는 거라고 알고 있는데 뭘로 유혹당한 걸까? 평소보다 더 탁해진 눈동자에 자신이 비치는 것이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며 미료는 지팡이를 꽉 쥐였다. "궁금하기는 해. 이거 이렇게 하면 재미있겠다, 같은 생각. 걸리적거리는 윤리는 없는 게 어떤 느낌인지." 와, 내 애인의 정신머리가 조금 일반적인 상식에서 ..

1차/서한결 2024.11.14

작명

아직 날씨가 덥네, 씻고 나온 의진은 기지개를 펴고 저무는 해를 바라보았다. 뻐근함을 지우기 위해서 기지개를 하고 멍하게 서 있으려니 저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황급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르는 목소리는 평범했지만 그래도 불현듯 설마 아이한테 무슨 일 있나? 그 아이한테 사고가 났나? "사고, 혹시 무슨 일 있나요?" "이제 훈련 끝났어?" "네, 죄송해요. 금방 왔어야 했는데 잘 있었니?" 사고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받으며 의진은 작은 아이를 꼬옥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작은 자신의 아이. 이제 목을 가눌 수 있게 된 아이는 가만히 의진을 보더니 옹알옹알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콩닥콩닥 뛰는 아기의 심장 소리에 쌀쌀한 날씨가 금세 잊혀진다. "다들 돌아가면서 아이를 돌보는 거니까 너무..

1차/고공&의진 2024.11.13